희망 속에 살아나는 삶의 의지
촛불 혁명이 일어났던 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이게 나라인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나라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했다. 상식이 있고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희망이었다. 어느 순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궁금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촛불혁명 이전에는 한국의 자살률이 10년 넘게 OECD 국가 중 1위였다.
심지어 “자살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과연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믿을 만한 자료들을 찾아보던 중, 신문에서 “한국인 자살률 1위”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또 1위였다. 우리는 나라를 바꾼 게 아니라, 정권을 바꿨을 뿐이다. 희망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힘이다. 고통스러운 삶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희망은 더욱 커진다. 반대로,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는 인지상정이다.
자살은 '죄'인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자살을 죄로 정의해 왔다. 피조물이 하느님께 받은 존엄한 생명을 거부할 때, 그리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할 때에도 죄이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 의해 처음으로 단죄되었다. 그는 십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에 근거하여 자살을 엄격히 단죄했다.
자살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살인이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자살에 반대하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자살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둘째, 자살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다.
셋째, 의도적이고 자유롭고 지속적으로 자살을 저지르는 것은 하느님께만 속한 권위를 찬탈하는 하느님에 대한 범죄이다.
가톨릭 교회는 서기 6세기에 자살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여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권위를 찬탈한 자들에게서 교회의 은총을 박탈했다. 19세기에 정신의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자살의 원인이 규명되면서 자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자살을 개인 차원의 윤리로 간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었다면, 과학적 연구는 자살의 원인을 사회적 조건으로 규정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 전환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도 당시 상황에 삶을 헌신했던 젊은이들 때문에 자살인지 사회적 살인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이슈였다.
그들의 죽음은 '죄'였을까? 아니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요한복음 15:12)이었을까? 자살에 대한 일방적인 논리를 정립하기는 어렵다.
자살의 유형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매일 뉴스가 되면서 우울증 또한 주목받게 되었다. 한국 의학계에서 자살의 주요 원인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자살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이다.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은 교회가 자살의 유형을 구분하고 일부 사망자에 대한 장례를 허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자살을 개인 윤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의지와 행동을 윤리적 규범으로 간주한다.
우울증이 자살 행위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수많은 자살 유형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에밀 뒤르켐(1858-1917)이 분석한 자살 유형은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기적 자살은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사회에서 쉽게 발생한다.
응집력을 잃은 사회는 개인에게 삶의 고통을 견뎌낼 이유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자살권을 인정할 수 없다.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대의나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현상이다. 이타적 자살은 다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의무적 이타적 자살, 자발적 이타적 자살, 그리고 극단적 이타적 자살이다.
이들은 사회 집단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유형은 아노미적 자살이다. 이는 사회적 규제가 자살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사회적 규제는 개인의 무한한 자기만족 욕구를 규제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한다. 사회가 규제력을 잃으면 구성원의 욕망을 규제할 수 없게 되고, 공동체 규범은 붕괴되며, 사회는 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개인의 욕망은 무질서한 욕망, 즉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에 참여하게 된다. 끝없는 욕망 충족은 끝없는 좌절을 초래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한다. 끝없는 욕망을 쫓는 자나, 뒤처지는 자 모두 불안정한 삶의 조건에 내몰리게 된다.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자살이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 사태 시기에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전년 대비 34% 증가했다. 코로나19 응급실에서 확인된 자살 시도 건수는 20대가 가장 많았고, 20대 남녀 모두 증가율이 1, 2위를 기록했다. 주요 원인은 불안정한 고용과 열악한 근로 환경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는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자살률 또한 거의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경제 발전 순위 세계 10위권에 올랐으나, 생명 존중 이념이 강하여 여성의 '자기 결정권'까지 반대했던 국가의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살 행태는 대부분 제도적 아노미 상태에서 발생한다. 그 원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가치관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 시장 경제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개인이나 가족의 권리와 책임으로 전가했다. 우리 모두는 적자생존의 원칙 아래 살고 있으며, 1990년대생들은 더욱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복지를 사유화하는 정치는 불확실성과 절망에 익숙한 인구를 대량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은 비정규직 노동과 취약한 사회 복지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자기 책임 윤리’와 각자 생존의 원칙을 정당화한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평균 10만 명이 산업재해를 겪고 2,400명이 사망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이는 피할 수 있는 죽음이라는 점에서 자살과 다를 바 없다. ‘자살이나 산업재해라는 미명 아래 은폐된 학살’이다. 적자생존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그 논리는 그들이 무능하고, ‘정상’에서 벗어났으며, 사회에 이롭지 않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죽어가는 사람들 스스로를 은폐된 학살의 원인으로 만든다. 또한 평등과 연대를 약속했던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이러한 상황을 허용하는 사회 구조는 악이며, 이를 외면하는 자는 죄인이다. 따라서 자살은 그것을 허용하는 우리 모두의 죄이다.
죽어도 되는 것을 만들지 말라
도나 해러웨이(D. Haraway,1944~ )는 “죽이 말라”라는 계명을 비판한다. 이 계명은 “죽음”과 “살해”의 차이를 은폐한다. 마치 아무 생명도 죽지 않는 것처럼 “살인”을 은폐하는 반면, 특정한 생명을 위해서만 죽일 수 있는 생명을 만들어낸다. 죽일 수 있는 생명은 희생의 논리에 의해, 마치 그렇게 죽을 운명인 것처럼 차별받는다.
해러웨이는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생명에 대한 차별을 비판하며, 차별과 증오로 인해 죽는 생명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당하는 것”임을 폭로한다.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생명을 보호하고 생산한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도덕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비인격적인 죽음을 끊임없이 양산한다.
따라서 그는 “죽이지 말라”라는 계명은 “죽음을 가능하게 하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살생의 죄를 피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생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삶을 넘어 '우리 모두의 삶 전체'에 대한 상식을 키워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는 인류가 운명 공동체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지난 한 해 동안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우리 사회의 잔혹함과 불평등, 그리고 우리의 숨겨진 본색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뚜렷해지는 무관심과 이기심의 문화는 우리가 인간 존엄성을 잃었다는 신호'이다. 생명을 초월하는 발전과 성공은 악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적 기준은 증오를 낳는다. 생명에 대한 차별은 피할 수 있는 죽음을 허용한다.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회는 우리 모두가 비인간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죽어도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은 없고, 다른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때 나를 구원해 줄 신은 없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과 발전의 모델을 찾아야 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시장의 힘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교황은
"서로가 필요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다는 것을 인식하는 연대"
를 강조한다.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하나의 삶'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