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1) 소는 선천적이고 심리적인 소질이다.
왜 소를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소를 찾아가는 이유는 변환을 위해서다.
"변환은 바로 가장 낮은 것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의 이동이다. 동물적이며 고태적인 유아성에서 신비적인 '최고의 인간(homo maximus)' 으로 이어진다."
이 말은 소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은 동물적이며 고태적인 유아성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를 탐구하는 일은 유아성에서 최고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함이다.
정신의 가장 아래층에는 동물적인 근원적 존재가 있다. 그 동물적인 근원은 인간의 선천적이고 심리적인 소질이다. 그것은 인간 진화의 결과로서 모든 조상의 경험적 침전물이기도 하다. 재생의식의 상징성이 동물이 되는 것도 인간 본성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우도의 소가 부처의 상장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본성의 동물적 성질은 악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는 의식에 의해서 배척당하게 된다. 하지만 동물적 성질에는 근원적인 어머니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의식의 본질은 분별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신과 전혀 다른 내용물을 가진 무의식을 대극으로 나눈다. 이러한 분리에 의해서 의식은 무의식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자체적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 현상은 정신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필연적 과정이다. 그러나 의식과 무의식은 근원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우도는 성숙한 의식의 인격이 정신본연의 세계인 근원적 어머니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마치 오지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자식이 도시 문명 속에서 다양한 것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와 다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처럼 분리된 의식의 정신과 무의식의 정신을 합일하는 주체는 결국 단일성( Einheitdml)의 원형인 자기(Self)이자 부처인 무아의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를 왜 무아의식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부처를 존재로 보느냐 기능으로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를 존재적 개념으로 인식하는 많은 기록들이 보인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부처의 존재론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부처를 기능론으로 확립시킨다. 그 이후 조사선에서 부처의 기능론이 완전하게 꽃을 피운다. 그런데 나가르주나의 기능론의 근원은 곧 고타마 싯다르타다. 그가 부처를 기능이라고 말한 이야기로 언급한 경전이 있다.
그 다음으로 너는 부처 '자신을 지각해야' 한다. 너는 '어떻게'라고 질문하겠지? 모든 불여래佛如來는 그의 호흡이 자연의 원리인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 만약 네가 부처를 지각했다면, 실로 너의 의식은 네가 부처에게서 지각하는 저 32개의 완전성의 표지標識와 80개의 탁월성의 표지를 소유하게 된다. 드디어 그것은 부처가 되는 너의 의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실로 '부처인 너의 의식'이다.
모든 부처들의 참되고 보편적인 앎의 바다는 우리 자신들의 의식과 생각 속에 그 원천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뉘지 않은 전체적인 주의력으로 너의 생각을 저 불여래, 부처, 성자 및 완전히 깨달은 자로 향하게 하여 주의 깊게 명상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은 카를 융이 '아미타-선경(阿彌陀-禪經)' 즉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의 본문을 옮긴 것이다. 즉 '아미타-선경'
에서 고타마 붓다는 의식이 곧 부처라고 말한다. 즉 초기의 미성숙한 의식이 자아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자아를 초월한 성숙한 의식은 부처와 연결된다. 부처는 인식의 주체라는 관념이 없다. 그것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비추는 태양과 같은 의식이라는 점에서 자아의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자아는 '나'를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본다. 그러므로 자아의식은 상대적 의식이다. 반면에 무아는 '나'라는 인식주체가 없기 때문에 사물이나 현상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식은 절대적 객관성이다.
무아는 무의식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의식으로 하여금 왜 근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지를 알려준다. 근원은 소가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자체적으로 동물적인 환상성을 지니고 있다. 동물적 환상성은 정신의 열등기능을 상징하는 미분화된 정신적 요소다. 그런데 부처는 미분화된 정신의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소를 탐구해야만 부처가 드러난다.
부처를 완벽한 도덕적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부처를 만날 수 없다고 조사들이 말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완벽한 부처 이미지는 자아가 만들어낸 판타지다. 자아의 판타지에는 부처가 없다. 왜냐하면 부처는 판타지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체적으로 근원적 존재를 동물성으로 상상하는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과 동물의 동일시는 무의식에 있는 동물적 본성을 의식하고 통합하는 일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소를 찾는 일은 근원적 존재에 대한 자발적인 탐구로서 성숙한 의식적 인격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숙명적인 의무사항이다. 왜냐하면 근원적 존재로 있는 동물은 의식화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 존재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동물적 성질을 의식화하지 않는 한, 존재로서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기 힘들다. 본능적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의식을 벽을 뚫고 나와 의식적 인간을 여지없이 위협한다. 그러한 무의식의 세계가 명명백백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경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 내면의 동물적 인간, 본능적 인간을 만나 그것을 인식하고 의식화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동물적 에너지가 아닌 진정한 생명력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소를 찾고, 소를 만나고, 소를 길들이고, 소와 하나되어야 하는 이유다. 소와 인간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는 한마음이다. 한마음을 융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창조, 영적 재탄생" 이라고 표현한다.
반인반수의 형상은 리비도의 이미지다. 자기 안의 소를 찾아 나서는 십우도는 반인반수의 상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인간적 특질이 원초적 심혼心魂의 동물적 신성 속에 열정적으로 잠겨들 때의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십우도는 원초적 심혼으로서 동물적 신성인 디오니소스적 비밀과 만나는 일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아득히 펼쳐진 수풀 속에서 소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아득한 수풀 또한 망막한데, 들소, 그것도 위험한 뿔과 강력한 힘을 소유한 황소는 더더욱 위험스럽다. 자칫 잘못하면 소를 찾기는커녕 펼쳐진 숲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소를 만난다 해도 그 소의 뿔에 부딪쳐 죽을 수도 있다.
소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집념, 그리고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모험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한다고 해도 선뜻 나설 수 없다. 그러므로 소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감행하고 그 모험에서 소를 찾고, 소의 고삐를 잡고,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무의식은 언제나 자아의식에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그 공포 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만 소를 찾고, 소를 길들이고, 소도 없고 나도 없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 그것은 자아의 판타지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러니 소를 찾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처 : 상징의 심리학
지은이 : 최명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