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3) 자신을 알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하다
'무의식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47을 통해서 더욱 명료해진다.
"이제 업業 쌓임은 모두 밝혀졌나니 이제 다시 수태受胎함이 없으리라. 여실히 진인의 자취를 따라서 아라한은 마침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간다."
즉 무의식에 대해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 어떻게 형성되고 축적되어 왔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업으로부터의 진정한 사유를 의미한다.
이것을 융 심리학으로 풀이하면 무의식의 의식화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아주 중요하다. 무의식이 의식화되었을 때 정신은 비로소 분리된 상태에서 벗어나 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통합은 불교가 말하는 한마음(一心)이다. 의식화되지 못한 무의식은 의식에게 위협적 존재가 되지만, 의식화된 무의식은 생명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와 같이 진술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제1송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茫茫撥草去追尋
水闊山遙路更心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晩蟬吟
아득히 펼쳐져 휘저어 뒤섞여 있는 잡초는 돌보지 않고 구하고 찾으니
물은 거칠고 산은 멀어도 길을 계속해서 찾는다.
힘은 빠지고 정신이 고달파도 머물지 아니하고 찾는데
오직 들리는 건 단풍나무에 앉은 매미소리뿐이다.
'거去'가 '물리치다', '거두어들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버리다', '돌보지 않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자의 해석을 취하여 문장을 구성한다면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가 아니라,
"아득히 펼쳐져 휘저어 뒤섞여 있는 잡초는 돌보지 않고 구하고 찾으니"가 된다.
물은 모든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는 근원으로서 생명수이다. 조주가 본성을 '태고의 쓰디쓴(苦) 샘물'이라고 했듯이, 융 심리학에서 물은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은 의식화되지 못한 근원적 정신이다.
의식의 본래 성질은 불처럼 밝고 가벼워 모든 것이 드러나지만 무의식은 무겁다. 그러므로 심혼의 바닥으로 내려와 있다. 물은 신성(Numen)과 치유가 있는 신비의 물이면서 동시에 자아에게는 원시적 불안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물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힘과 자율성은 이성에게는 언제나 엄청난 공포다. 인간 지성이 물을 외면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특성에 대한 자아의식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융은 말한다.
물은 지상적인, 만날 수 있는 것이며 충동이 지배하는 육체의 액체, 혈액이자 피비린내 나는 성질, 동물의 냄새이며 열정이 가득 찬 육체성이다. 무의식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뚜렷한 의식의 대낮의 밝음에서부터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교감신경으로 불리는 저 신경계의 아래쪽까지 미치는 그런 정신(Psyche)이다. 대뇌 척추계처럼 지각이나 근육활동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기관 없이 삶의 균형을 얻고 매우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동시에 흥분됨으로써 다른 생명의 가장 내면에 있는 존재로부터 오는 기별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이 내면의 작용에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극도로 보편적인 체계, 모든 신비적 융합(participitation mystique) 고유의 토대다. 반면에 뇌척추 기능은 자아가 명확하게 분리하는 데서 절정에 달하고, 항상 공간 매체를 통해서 표면적인 것과 외형적 형식을 파악하여한다. 후자는 모든 것을 외부적으로 체험하나, 전자는 모든 것을 내면적으로 체험한다. <원형과 무의식>
융은 무의식을 태양의 상징으로 비유되는 가장 강렬한 의식성과 육체의 충동적이고 동물적인 영역까지 포괄하는 그런 정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의 영역에는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의식성인 부처와 어리석음 그 자체인 중생이 하나로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의식을 탐구해야만 되고, 중생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중생과 부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부처는 중생 속에 있다. 그러므로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중생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중생을 만나는 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이 바로 자기 내면의 그림자 통찰 작업이다. 그림자는 의식에 의해서 외면된 정신의 어두운 성질이다. 사회는 원만한 유지를 위해 인위적인 인격을 요구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잘 숨긴 사람들을 사회는 인격자라고 부른다. 높은 인격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그림자가 없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우리 본성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는 사람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인격자는 본성의 한 부분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전체정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분리되어 있는 자신의 인격을 깨닫고 전체적 인간으로 통합을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전체적 인간이란 분리되어 있던 중생과 부처가 통합된 사람이다. 통합된 사람만이 자성이라는 고유성을 발현할 수 있다. 고유성의 발현이야말로 건강하고 창조적인 삶의 실현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행하든 모두 자신의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불행도 모두 자기 내면의 무의식의 성질에서 발견하게 된다. 자기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을 모두 외부적 원인으로 돌리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온전한 성숙함이다.
그림자는 원형적 내용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나약한 의식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착종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그만큼 그림자는 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림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왜 자기 내면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만 하는지를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정신, 혹은 부처는 높은 곳에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찮은 중생인 자신을 버리고 거룩한 정신이 존재하는 높은 곳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조주가 말한 태고의 '쓰디쓴 샘물'은 아래로 흘러 심혼의 가장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그 물을 찾기 위해서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의식에게 그것은 거친 망망대해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자아는 망망대해와 같은 집단무의식의 힘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망망대해는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공포다. 그만큼 집단무의식은 자아의식에게 무시무시한 대상이다.
자아가 부처나 위대한 신의 구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공포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십우도에 대해 '화답송(和)'을 쓴 석고이화상石皷夷和尙과 과납壞衲 대련화상大璉和尙의 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只管區區向外尋 오로지 성급하게 밖을 향해 찾느라
不知脚底已泥深 발밑 진흙수렁이 깊은 줄을 알지 못하네.
幾回芳草斜陽裏 몇 번인가, 방초 우거진 석양 속에서
一由新豊空自吟 풍년가 한 가락을 부질없이 불러본 게.
진리를 '밖을 향해' 찾는 것은 자아의 상대의식이다. 자아의 상대의식은 성불을 위해 중생을 버려야만 된다. 중생이 버려지면 중생에 연결되어 있는 집단무의식의 내용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집단무의식은 자아의식이 떨쳐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 즉 아뢰야식은 중생, 즉 자아의 근본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그것을 거부하면 할수록 그것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발밑의 진흙수렁이 될 뿐이다. 마지막 문단을 '풍년가 한 가락을 부질없이 불러 보았네'로 해석한다면 더 상황에 맞을 것 같다. 아래는 대련화상의 '화답송'이다.
木無踪跡是誰尋 원래 자취 없거늘 찾는 자는 누구인고.
誤入烟蘿深處深 등 넝쿨 우거진 깊은 곳에 잘못 들어왔구나.
手把鼻頭同歸客 손으로 코 잡고 함께 돌아가는 나그네가
水邊林下自沈吟 물가 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침음 한다.
과납 대련화상 역시 소를 찾으러 나서는 자아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발자취도 없는 부처를 찾는 그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부처를 찾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발자취도 없는 부처를 어떻게 찾겠다고 하는 건지 한심하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임제는 부처가 있다고 알려진 그곳을 '거친 풀'이라고 하고, 대련화상은 '등넝쿨 우거진 깊은 곳'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눈을 뜨기도 어렵고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흔적도 보이지 않는 부처를 찾아 나서기 전에 먼저 '나'는 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지 물가 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수변림하자침음(水邊林下自沈吟 : 물가 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침음 한다)" 이란 것은 내면으로의 진정한 침잠을 의미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침잠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본다. 그러나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중생의 모든 어리석음과 부정적인 모습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성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