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2. 12:12

십우도(十牛圖)와 심리 이야기

2. 견적 : 발자취를 보다

1) 십우도는 정신의 중심을 향한 완전한 집중이다

 

진화란 생물이 생식을 통하여 대代를 이어가면서 복잡한 것으로 분화하여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화의 과정은 물리적 현상뿐 아니라 정신적 현상 안에서도 존재한다. 그 과정을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이론화해 낸 사람이 바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본성에는 분명하고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성질이 그대로 존재한다. 의식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무의식으로 있는 성질들은 진화되지 못한 채 본래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무의식성으로 있는 동물성을 의식화하는 것을 융은 변환이라고 말한다. 동물성이 변화를 이루지 않는 한 의식과 무의식은 분리되어 있다. 즉 의식이 무의식의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체는 전체적 정신으로 통합될 수 없는 것이다. 

 

 분리된 정신은 모든 것에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은 무의식의 내용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억압할수록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에게 확인시키려 한다. 예상하지 못한 무의식의 출현들은 의식적 인간에게 매우 위협적이다. 그러므로 의식적 인격은 무의식적 인격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것이 심화되면 신경증과 같은 정신 병리적 현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무의식으로 있는 동물적 성질들이 의식화되어야만 정신이 온전한 상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순환적 발전', 즉 창조적 변환의 장소인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 상태란 바로 의식성이다. 무의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인식해야만 의식으로 편입이 될 수 있다. 

 의식적 편입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기 체험에서 깨어 있는 것이 바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체험의 내용에 대해서 이해가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마주해도 외면하거나 억압하지 않을 만큼의 의식적 인격의 준비가 갖추어져야만 한다. 즉 스스로 소를 찾으러 가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에서 보자면, 자기 관찰을 통해 도입된 과정을 그 모든 전환점마다 체험하고 최선의 이해를 통해 의식에 편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물론 의식적 삶과 무의식적 과정 간의 예기치 않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흔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긴장을 가져온다. 무의식적 과정은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으며 가시적인 삶의 표면에는 결코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의식 생활의 논리는 이렇다. 

 즉 "지각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지성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의 원리는 정신 자체의 자율성이다. 정신은 비록 자체의 상像을 명료하게 나타내기 위해 감각세계가 부여하는 표상의 가능성을 사용하고 있기는 한다. 하지만 그 상들의 활동 속에 세계가 아닌 정신 자체를 반영한다. 여기에서 감각의 자료는 '작용의 원인'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선택되고 차용된다. 그로써 우주의 합리성은 극도로 고통스러울 만큼 끊임없이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감각세계는 또한 그것이 '작용의 원인'으로써 정신 내면의 과정 속에 침입하였을 경우, 그 과정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성이 상처를 입지 않고 다른 한편 상들의 창조적 활동이 어설프고 난폭하게 억압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융합할 수 없는 것의 융합이라는 역설을 실현시키는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합성 방식이 필요하다. 

 발췌 :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경남 청도 운문사

 

의식적 삶과 무의식의 삶은 너무도 다르다. 만일 의식과 무의식이 이처럼 판이한 세계가 아니라면 분리도 없었을 것이고, 고통도 없었을 것이며, 정신의 통합이라는 이토록 어려운 과제도 없었을 것이다.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의 만남을 물과 불의 만남처럼 '융합할 수 없는 것의 융합'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에서도 두 세계의 극단적 이질성異質性이 드러난다. 

 의식적 논리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지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자아의식의 체계 안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적 과정은 표면적인 삶 안에서 결코 이해될 수 없다. 무의식이 자신의 의도를 표명함에 있어서 자아의식의 감각세계를 표상하고 있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달의 표현 수단일 뿐, 표상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징은 이러한 체계가 다른 두 성질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준비되지 않는 의식적 인격이 무의식의 인격을 만나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뱀이 물 때 준비되지 않은 의식적 인격이라면 그는 뱀을 피하거나 죽일 것이다. 뱀을 피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전체성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일이다. 이것이 무의식과의 온전한 통합을 위해서 자아의식의 초월이 요구되는 이유다. 

 

 십우도의 신화는 스스로 소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다. 그것은 십우도의 주인공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성이 상처 입지 않고 무의식의 내용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소를 찾으러 가서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일은 완전한 집중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변환의 장소인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일어나면 무의식과의 접촉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순환적 발전', 즉 창조적 변환의 장소인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 우리는 동물들에 의해 '물리게' 된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동물적 충동에 노출되는데 그렇다고 그것과 동일시되지도 않으며 또한 '거기에서 도망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으로부터의 도피는 이 변환 과정의 목적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변환의  초기과정에서 나타나는 뱀은 무의식의 동물적 충동으로써 '형태 없는 생명 덩어리', '혼돈'을 연상시킨다.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일어났을 때, 무의식의 동물적 충동을 알아차리게 된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동물적 충동에 그대로 흡수되어 버리는 무의식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충동성에 대한 뚜렷한 의식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뱀보다 소는 더 분화된 동물이다. 분화된 동물의 표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동물적 충동이 모호한 혼돈의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인식이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중앙으로서의 집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일이 동물적 충동이다. 그렇다면 충동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즉 충동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충동은 생리적 역동성으로 체험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다양한 모습이 상과 일련의 상의 결합으로 의식에 나타나고 생리적 충동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혹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누미노제(신성력)의 작용을 전개한다. 종교적 현상을 아는 사람들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열정이 비록 적대적이긴 하지만 형제이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바뀌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안다. 두 가지 모두 진실이며 정신적 에너지의 풍부한 원천이 되는 대극의 쌍을 이룬다.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의 우위에 세우기 위해서 하나를 다른 하나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하나만 알고 있다가 다른 하나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나중의 하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극성이 없는 존재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 현존이 전혀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발췌 : <원형과 무의식> 

 

 

 본성에서 충동은 생리적 충동과 정신적 충동이 함께 있다. 충동이 의식에게 전달될 때 감각세계가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의식이 낮은 차원에서는 충동의 상징은 그대로 생리적 충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의식이 높은 차원에서는 생리적 충동은 극복되고 누미노제(신성력)로 바뀌게 된다. 

 종교적 열정과 육체적 열정은 극명한 대립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의 뿌리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 열정을 극복하여 종교적 열정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의 금욕수행이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행해진 것이다. 육체적 에너지도 종교적 에너지도 모두 본성의 에너지로서 진실이고 두 개의 영역이 모두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충동이 육체에 받아들여지고 육체가 감각에 길들여지면 충동이 정신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본성이 지향하는 정신적 목표를 방해하는 일이다. 충동은 대극성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즉 육체적 충동으로 다가왔을 때 의식은 그것을 선명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선명하게 인식된 무의식의 내용은 의식화를 밟게 된다. 무의식이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는 한, 의식은 무의식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충동이 가지고 있는 대극성은 무의식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충동영역으로 침강한다고 해서 충동의 의식적 실현이나 동화同化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심지어는 큰 공포에 사로잡혀서, 충동영역의 원시성과 무의식성에 삼켜지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이 불안은 영웅 신화의 영원한 대상이자 수많은 금기의 모티브다. 본능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 위험한 심연의 어둠 속에서 의식의 빛을 지키려는 절박한 갈망이 나타난다. 그러나 원형은 충동의 상으로서, 심리학적으로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정신적 목표이다. 그것은 모든 강이 굽이쳐 흘러가는 바다이고, 영웅이 용과 싸워 이겨 획득한 상금이다. 

<원형과 무의식> 

 

 

무의식의 움직임을 제지하거나 피하지 않으면서 현실처럼 체험하는 일은 오직 건강한 의식성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이 무의식의 충동영역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충동이 의식화되지 않는다. 황소에 대해서 전혀 지식도 경험도 없는 사람은 황소를 보는 순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십우도의 영웅은 황소에 대해 익히 알고 있고 그것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므로 그는 황소와 싸워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종교, 혹은 철학의 관점이 인간 본능의 동물적 충동을 도덕적으로 제어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했다. 그러나 십우도에서는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통합하는 심리적 방법을 찾아 나선다. 도덕적 해결방법이 자아를 강화시킴으로써 충동을 제어하는 것이라면, 심리적 해결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함으로써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도덕적 방법은 충동을 억압하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은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즉 심리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방법은 정신의 전체성에 대한 구체적 이해에 이르기 때문에 분리가 아닌 통합이다. 도덕적 방법이 훈련에 의한 방편적인 해결에 그친다면, 심리적 방법은 정신에 대한 통찰로서 근본적인 해결이다. 

 도덕적 해결 방법론에서 신체에 대한 폄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신체는 죄를 범하게 하는 근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체 폄하에 대한 반대급부는 정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영적이며 선한 이미지를 갖는다. 선善은 의식적 관점이다. 

 

 의식적 관점에 대한 치중은 무의식에 대한 몰이해를 가져온다. 무의식에 대한 몰이해는 의식 중심의 편중된 정신이다. 정신은 의식으로는 다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무의식은 몸에서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방법론에서 몸을 멀리하고 기피하며 폄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십우도에서는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찾아 나선다. 인간을 끝없는 갈등 속으로 몰고 가는 그것의 본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을 끝없는 갈등 속으로 몰고 가는 그것의 본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은 의식할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식되지 않는 삶은 주인이 없기 때문에 실체도 없다. 주인 없는 삶은 허구일 뿐이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