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견적 : 발자취를 보다
2) 충동에 노출되지만 놀라지 않고 인식한다
십우도는 순환적 발전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신화 중의 하나다. 십우도는 순환적 발전을 위해 그 변환의 장소인 정신의 중심으로 스스로 찾아들어 간다. 즉 중심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가에 있는 소의 발자국들을 보게 된다.
앞에서 융에게 중앙으로의 집중을 의미하는 상징은 뱀에 물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십우도에서의 소의 발자취를 보는 것에 해당한다. 즉 자발적으로 무의식의 동물적 충동에 노출되는 것이다. 충동에 노출되지만 그것에 전혀 놀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제2 송 : 견적見跡
水邊林下跡偏多 (수변림하적 편다)
芳草離披見也麽 (방초리피견야마)
縱是深山更深處 (종시심산갱심처)
遼天鼻孔怎藏他 (요천비공즘장타)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기리.
융은 수변水邊에 대하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선으로서 통과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십우도 영웅이 물가에 이르러 발자국을 봤다는 것은 무의식으로의 침하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물에 대한 명상에서 물은 지혜의 구원수救援水이자 가르침의 물을 나타낸다. 즉 물의 원천은 부처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이 명상을 통해 명상하는 사람은 부처가 바로 명상하는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융은 말한다.
부처는 '모든 존재를 받아들이는' 대자대비로 특징되고, 환상으로 나타나고, '명상하는 자의 자기'로서 나탄나다. 부처 자신은 유일한 존재로서 바로 부처인 최고의 인식으로서 경험된다. 이러한 최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착각을 일으킨 무명의 자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착각의 세계가 지양止揚되는 저 다른 심혼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힘든 정신적 복원復元 수련의 긴 도정을 필요로 한다. <인간과 문화>
부처란 '흩어지지 않는 주의력'으로서의 의식성이다. 즉 부처는 자기 자신을 절대적 객관성으로 관조하는 최고의 인식기능이다. 최고의 인식은 '흩어지지 않는 주의력'에 의해서 일어난다. 흩어지지 않는 주의력이란 순수한 의식성으로서 엄청난 에너지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아의 상대의식이 아닌 무아의 절대의식이다. '흩어지지 않는 주의력'은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과 같은 의미다.
자아의식이 갖는 모든 인상은 감각적인 것에 의존되고 있다. 그것은 모두 외부적인 것이다. 무의식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적인 일이다.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자아의식으로서는 무의식과의 접촉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아의식의 그러한 습관을 끊게 하기 위해서 붓다는 물의 명상을 권한다. 물의 명상은 환상이나 '명상하는 자의 자기'로 나타나는 상을 흩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게 한다. 즉 적극적 명상(aktive Imagination)으로 이끄는 것이다.
<인간과 문화>
태양과 물이 육체적인 생명의 원천인 것처럼, 상징으로서의 태양과 물은 무의식의 주요한 생명의 비밀을 표현하고 있다. 요가행자가 청금석 기반을 통해서 보고 있는 상징으로서 기旗에서, 그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외관상 형태가 없는 의식적 원천의 형상을 어느 정도 보게 된다. 선정禪定을 통해서, 즉 명상의 침잠沈潛과 심화를 통해서 무의식의 상을 취한다. 그것은 마치 외부의 감각적 세계의 대상들을 비추기를 그만둔 의식의 빛이 이제부터는 무의식의 어둠을 비추는 것과 같다. 감각세계와 그 감각세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내부(마음속)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과 문화>
여기서 붓다가 왜 감각적인 인상에 대한 의존을 끊고자 했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진다. 감각적 인상에 의존되어 있는 자아의식은 오감에 지각되는 것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무의식은 감각의 세계로서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빛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선정禪定은 인간 본래의 모습을 명상하는 것이다. 즉 명상으로 인하여 내면으로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근원과 만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정이다.
어머니-이마고를 물에 투사하면 물에 누미노제나 마술적 특질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합당하다. 그 좋은 예가 교회에 있는 세례용 성수의 상징이다. 꿈과 환상에서 큰 물은(특히 남성의 경우에) 의식의 모체 혹은 모상母床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주관단계로 해석한다면-물처럼 모성적 의미를 지닌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물은 모성적 심연을 의미하며 동시에 재탄생의 장소를 나타낸다.
이것은 무의식에 대하여 왜 어머니-이마고를 사용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자아의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무의식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져 있었지만, 성숙한 자식이 어머니를 찾듯이 성숙한 자아의식이 본성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아의식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이 바로 본향本鄕을 의미하는 물, 즉 무의식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심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영웅이 소를 찾아 나서 제일 먼저 물을 만나고 물가에 도착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징이다.
물은 변환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다. 연금술에서는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어 중의 하나가 바로 "변환"이다. 변환이란 하나의 특정한 성질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물이 불에 가해지면 기체화된다. 오메가로서 근원의 씨앗인 영적인 힘이 외부적 형체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물이다.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 중에서 물은 가장 큰 퍼센티지를 차지한다. 말하자면 몸은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인 셈이다. '영적인 물'은 그 자체가 진리이며 모든 지혜의 탐구자이다. 몰은 순환운동을 특징으로 한다. 물의 순환운동이 상징하는 것은 몸을 영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다. 이 변환작업에 의해서 세계 원리(princupium mundi)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계의 원리는 무의식이 의식화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태양과 물은 무의식의 주요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융은 특정한 종교에 나타나는 주된 상징들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도덕적⦁정신적 자세가 담겨 있다고 본다. 이것은 십우도의 신화에서 표현되는 특정한 형상들도 결국은 십우도가 전하고자 하는 정신적 자세에 대한 표현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게 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연금술에서 영(靈, Geist)은 물과 관련이 있다. 물과 영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세례의식은 높은 의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이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는 육체적 존재가 정신적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의 무의식이다. 무의식을 상징하는 물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의식에 대한 인식(ennoia)과 무의식의 의식화를 나타낸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자아의식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던 정신적 내용들에 대한 재생이며 부활이다.
물의 세례를 통하여 얻는 것은 의식성이다. 앞 장에서 이미 진술된 바와 같이 의식성은 부처이자 신이다. 물에 잠수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무의식으로 침하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금술에서 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원질료(原質料, prima material)로서 신적인 물이다. 물은 본래의 비밀(arcanum)을 가지고 있다. 연금술은 그 본래의 비밀을 밝혀내고자 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나일 강의 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인도의 갠지스 강 역시 인도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힘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도 석가탄신일에 아기 석가 상像에 작은 바가지로 물을 붓는 예식이 있다. 아기부처에 대한 세례의식은 아마도 그것을 행하는 자의 영혼을 위한 세례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행위자들은 세례행위를 하면서도 그 행위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연금술에서 물은 천상의 물이고, 영靈에 의해서 생명을 갖는 신적인 물이다. 물은 삶과 죽음의 순환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연금술사들로 하여금 물을 통해서 죽음과 재생의 비밀을 알아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천상의 물, 신적인 물은 곧 무의식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상징들과 동일하다고 융은 말한다. <인간과 문화>
그의 창조력은 무의식(물)에서 '퍼올려지면서' 그때 의식된 내용으로서 신(오시리스)을 생산한다. 이러한 관계는 개인적인 체험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파밀레스는 물을 긷는다. 이런 행동은 상징적이며 원형으로서 체험될 수 있다. 그것은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려진 것이다. 끌어올려진 것은 누미노제를 지닌 것, 즉 그 이전에는 무의식이었던 내용들이다. 그 내용이 하늘로부터의 목소리에 의해서 신의 탄생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은 요단 강의 세례에서 되풀이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러므로 죽음과 재생의 과정은 무의식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 인간이 물의 상징성과 소의 상징성을 만들어내었는지, 왜 무의식을 의식화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물이 모성성으로 상징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물이 물리적 생명의 원천이라면 무의식은 정신적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탄생의 의식儀式도 재탄생의 의식도 모두 물의 상징을 빌어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물(aqua permanens)은 둥근 것(rotundum)과 마찬가지로 순환운동의 상징이다. 지상에 있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돌아오는 끊임없는 순환이다. 그런데 이 영원하고 경이로운 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힘은 스스로 생명을 잉태시키고 스스로 죽이기도 한다. 즉 창조와 파괴가 같이 있다. 뿐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 남성성과 여성서의 원리가 동시에 존재하며 음과 양으로서 서로 균형을 이루는 물이다. 이것은 무의식의 성질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