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견적 : 발자취를 보다
3) 물, 나무, 소는 모두 리비도를 상징한다
水邊林下跡偏多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물가에 나무가 있고, 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있다. 즉 물가 나무 밑에 소가 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물과 나무, 소는 모두 리비도를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융에게 있어 리비도는 육체적⦁정신적 열정을 나타내는 단어다. 프로이드는 리비도를 성적 개념에 한정시켰다. 반면에 융은 리비도를 모든 생명현상으로 확대한다. 즉 배고픔, 갈증, 수면, 성욕, 감정적 욕구, 정감(Affekte)과 같은 자연적 욕구(Automatismen), 강박 충동(compulsio), 더 나아가 에너지로서 '정신적 영역'에까지 이른다.
융은 리비도를 '정신적 에너지(Psychische Energie)'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리비도는 증식본능(propagationstrieb)인 성욕과 자기 보존본능인 배고픔과 증오, 그리고 권력과 종교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 전반에 결친 에너지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상징과 리비도>
이것은 앞 장에서 진술한 것처럼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 모두 하나의 뿌리라는 것과 통한다.
리비도는 동시에 인간의 인격의 한 부분을 형성하므로 그에 걸맞게 유인아목원類人亞目猿의 영혼(authropoide Seele)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에너지처럼 리비도도 그 자체로서 나타나지 않고, 다만 '힘'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즉 움직이는 물체들, 화학적 혹은 전기적 압력과 같은 '어떤 것'의 특정한 에너지 상태이다. 따라서 리비도도 어떤 특정한 형태들, 혹은 상태와 결합된다. 리비도는 욕동(Impulse), 정감(Affekte), 활동성 등의 강도(Intensität)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상들이 비인격적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인격 부분들처럼 표명된다. 같은 생각을 콤플렉스론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 콤플렉스도 마찬가지로 인격의 부분들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유인아목원의 영혼은 합리적인 문화 형태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마지못해 겨우 수용한다. 그리고 문화적 발달에 될 수 있는 대로 저항하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그 리비도가 항상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근원적이자, 무의식적인 상태를 되돌아보며 그리워하는 것과도 같다. 되돌아가는 길, 즉 퇴행(Regression)은 어린 시절에 이르고 마침내 자궁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융의 이론으로 볼 떄, 리비도는 의식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연적 성질이다. 마치 앞에서 언급된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주인공 골드문트의 야성적 어머니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를 찾으러 가는 것도 결국은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에너지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리비도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리비도는 또한 비록 그것이 분명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결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리비도에 대한 상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은 알려진 어떤 사물에 대한 기호나 비유가 아니다. 상징은 거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상事象만을 암시하려고 한다. 이런 모든 상징들의 제3의 비교가 리비도인 것이다. 의미의 통일성은 오직 리비도 비유에 있다. 이 영역에서 사물의 고정된 의미는 끝이 난다. 거기서 유일한 실재성은 리비도인데, 우리는 리비도의 존재를 단지 우리의 실현(Bewirktsein)을 통해서만 경험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리비도가 나타내는 상징들은 비록 개체가 관찰할 수 있는 형체形體의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다. 아니 알려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무이한 성질로서 일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고유성의 주인만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의식의 시각으로는 그 영역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를 찾으러 가는 행위가 진짜 현실적 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리비도를 의식의 지배를 받는 정신적 에너지로만 이해한다면, 그에게는 그런 식으로 정의를 내린 종교적 관계는 당연히 자기 자신과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유희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원형 또는 무의식에 속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뜻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로 보이는 이러한 관계는 결코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 신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에는 많은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행복이나 권력의 보증이 되며, 심지어는 그 속성이 신격에 상응하는 한 전능의 보증이 된다는 것이다. 신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은 거의, 그 자신이 신이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상징과 리비도>
무의식의 내용을 단순히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아가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리비도의 이론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정신이 신뢰를 가지는 과학 또한 리비도의 또 다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리비도는 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과 행위의 근원이다. 리비도의 속성이 신성이고 그 신성을 의식화함으로써 인간은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내재된 신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시편」 82장 6절에서 사람이 신이라고 쓰여 있듯이, 석가모니 붓다가 사람이 곧 부처라고 말했듯이, 신격화의 관념은 태고에서 시작된 인간정신의 발현이다. 그것은 인간의 심혼 그 자체가 신격으로 고양될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를 찾는 일은 인간 정신이 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과정인 것이다.
水邊林下跡偏多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소의 발자국들은 물가에 있는 나무 아래 있었다. 나무 또한 리비도로서 생명을 상징한다. 나무는 여성성과 남근적 상징성이 혼합되어 있는 자웅동체로서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물과 마찬가지로 흔한 어머니의 상징이 생명의 목재와 생명의 나무이다. 우선 생명의 나무는 열매들을 달고 있는 족보나무, 즉 일종의 종족의 어머니이다. 인간의 기원이 나무에서 비롯되었음을 수많은 신화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신화가 또한 영웅이 어떻게 모성의 나무 속에 밀폐되어 있는지를 제시한다. ⦁⦁⦁⦁⦁⦁ 여성 신격들은 자주 나무로서 숭배되었으며, 그래서 성스러운 숲과 나무들의 의례儀禮가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즉 나무는 인간의 기원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단군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인 환인桓因은 태백산에 있는 신령神靈한 나무(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웅녀熊女와 결혼해서 한민족의 시조始祖인 단군檀君을 낳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집어낸다면, 십우도의 신화와 단군 신화가 근원적으로 닮아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인이 의식적 측면이라면, 단군의 어머니 웅녀 역시 동물로 상징되는 무의식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군은 의식과 무의식의 상징적 결합에 의해 창조된다는 점이다.
다시 나무의 상징으로 돌아와서, 환웅과 웅녀의 창조물인 단군의 이름이 박달나무(檀)다. 신령한 나무인 박달나무는 바로 생명의 근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옛 한국의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는 거의 대부분이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 곁에는 신목神木이 있거나 장승이 세워진다. 서낭당은 나와 개인을 지키고 보호하는 우리 조상들의 수호신으로 신앙되었다.
십우도 신화에서도 소는 태초의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물가 나무 아래에 있는 소의 발자국을 본다는 것은 태초의 세계에 도착함을 알린다. 그러므로 십우도에서 나무를 발견한다는 것은 십우도 영웅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 혹은 잃어버렸던 원초적 성질로서의 남성 속의 여성성 혹은 여성 속의 남성성을 발견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자웅동체다.
그러나 남성으로 태어나면서 자신의 여성성은 무의식 속에 남겨진다. 여성으로 태어나면 남성성은 무의식에 남겨진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반대적 성질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그 대신 잃어버린 반대의 성질들을 밖으로 투사되기 때문에 외부에 있는 이성에게서 찾느다. 왜냐하면 자아의식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의 확인 가능한 것들을 통해서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상대의식만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사람은 소를 찾아 나선다. 소를 찾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신의 반대적 성질이다. 그것이 나무로 상징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제례祭禮와 신화에서 나무는 이미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형적인 나무의 신화는 낙원의 나무, 혹은 생명의 나무다.⦁⦁⦁⦁⦁⦁ 신화적으로 볼 때, 인간의 기원이 나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되듯이, 빈 나무통에 매장하는 장례 관습들도 나무와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관을 '죽음의 나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나무가 중요한 어머니 상징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매장 방식의 의미가 이해될 것이다 :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삶에서 인간이 치르고 있는 의식儀式 하나하나가 모두 근원적 성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어쩌면 그것은 본성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에 대한 열망들이 그렇게 상징성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숲은 리비도의 상징이다.
인도의 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보리수나무에는 어머니 상징을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융은 말한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 또한 이러한 상징성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 있는 금속나무 혹은 현자의 나무(arbor philosophica)는 최고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영적 성장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숲(林)은 깨달음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芳草離披見也麽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방초芳草란 풀이지만 향기가 나는 꽃 같은 풀이다. 잡초가 향기나는 아름다운 꽃과 같다는 것이다. 방초를 헤치고서 보는 것은 관찰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왜냐하면 삶 자체의 모든 순간들이 모두 그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뇌가 부처를 이루어내는 근원임을 알 때, 잡초는 향기 나는 풀이 된다. 진정한 삶을 피워내는 본체를 융은 심혼心魂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심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조용하고 끈기 있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십우도의 제1송에서 소를 찾아 밖으로 헤매던 수행자가 물가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즉 집단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한 것이다. 불교에서 아뢰야식을 말하고 있듯이, 융은 정신에 존재하는 집단무의식을 말한다.
집단무의식이란 모든 사람이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태고유형(archetype)이다. 그것은 보편적 성질을 갖고 있다. 융은 사실 우리가 개인의식의 내용이 갖는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구별되고 있기는 하지만, 무의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의 내부는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민족을 외치는 것도 , 태고의 인류와도 심리학적인 연결이 될 수 있는 것도, 무의식이 가지고 있는 상들이 모두 같은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단무의식은 집단정신으로 연결된다. 집단정신은 무의식성, 즉 무명이다.
그런데 종교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고유성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러므로 진정한 깨달음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찾는 것이고, 그 고유성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부처는 부처를 찾는 사람의 가장 고유한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석가모니 붓다를 흉내 낸다고, 그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간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고유성은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이 부처이고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유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신적 기초로 되어 있는 집단무의식의 동일형식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