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웅 신화는 무의식의 드라마다
융은 원시심리학과 신화학이 정신의 깊은 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의 원형적 재료들은 개별적으로 변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신의 보편적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실제로 융은 현대인의 꿈이나 환상에서 보이는 상징들이 고대 원시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것은 상징 그 자체가 정신의 내용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본질,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상징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웅 신화는 그리스 ⦁ 로마 ⦁ 중세 ⦁ 동아시아를 비롯해 현재도 원시 종족으로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인간 본연의 정신세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즉 문화적 교류가 전혀 없는 곳의 부족이나 종족에서도 비슷한 구조의 공통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조차도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꿈을 통해서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영웅 신화를 무의식이 투사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영웅이란 비범한 존재다. 그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재능을 가졌고, 그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는 용맹과 힘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영웅에는 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에는 이러한 영웅의 원형이 이미 존재한다. 그것이 융에게는 자기(Selbest)가 되고,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며,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된다.
영웅 신화는 무의식의 드라마이며, 영웅은 신으로의 변환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융은 말한다. 언제나 실재를 거부하며 이상적 판타지를 꿈꾸는 자아의식은 영웅이 가진 이러한 신성을 열망하여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동일시는 자아의 팽창으로 이어진다. 자기와 자아(혹은 부처와 중생)의 동일시로 일어나는 팽창은 과대망상과 같은 병리적 현상이다. 이것이 자아의 죽음 혹은 자아의 초월이 요구되는 이유다.
영웅에 대한 상징성은 자아 강화에 관한 이야기다. 높은 성의 탑 안에 갇힌 공주를 구하려는 영웅에게는 어려운 역경을 뚫고 나갈 강력한 체력이 필요하다. <인간과 상징>
자아 역시 무의식을 의식화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아의식의 구조가 필수적이다. 자아의식의 구조가 튼튼해야 엄청난 무의식의 에너지를 흔들림 없이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의 구조가 영웅 신화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현대 만화영화 슈렉 Shrek의 이야기를 해보자. 슈렉 역시 영웅 신화의 구조 위에 그려진다. 주인공 슈렉은 저주에 걸려 용이 지키는 높은 성에 갇힌 피오나 공부를 구하고, 동화 속의 귀여운 주인공들을 다 쫓아낸 무정한 파콰드 영주를 응징하러 간다.
물론 이러한 영웅 신화의 구성이 페미니스트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심층심리학적으로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만 한다. 영웅 신화가 거의 남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정신적 구조를 나타내는 상징성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이고, 의식은 모성을 그리워하는 자식으로서의 남성성이다. 무의식의 상징인 여성성은 아이게는 어머니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면, 성인 된 남자에게는 여성성이 아니마로서 나타난다.
영화에서 피오나 공주를 만나기 전의 슈렉은 건장한 힘을 가졌지만 아무도 자신의 곁에 두지 않는 거칠고 초록 짐승에 불과하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의식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남성성이 강조되면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의 영역인 여성성을 억압하게 된다. 그러나 의식의 힘이 강화되면 무의식을 충분하게 의식화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슈렉은 높은 성에 갇힌 피오나 공주를 용의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구출한다.
용은 무의식의 부정적이고 무자비한 행위를 상징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슈렉과 피오나 공주의 성공적인 사랑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진정한 만남이자 통합이다.
힘은 장사지만 혼자 고독하게 사는 슈렉처럼 모든 신화에서 영웅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영웅은 스스로를 강인하게 단련함으로써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간다. 물론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도움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영웅이 갖는 지혜와 비범한 능력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무의식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현실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 그는 종교적 힘에 의존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의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다고 말하고, 불교인들은 부처님께 맡긴다고 말한다.
이때 자아는 자신의 힘보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융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무의식에는 신이 나 부처로 부를 만한 신비한 힘이 들어 있다. 그것이 치유능력 ⦁ 예언능력 ⦁ 타심통과 같은 신통력으로 나타난다. 미래를 예언한 꿈들은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적 생각들이 흔히 미래와 미래의 가능성에 몰두하는 것처럼, 무의식과 그 표현인 꿈도 미래를 생각한다. 꿈의 중요한 기능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은 오래전부터 내려왔다. 고대로부터 중세까지도 꿈은 병의 예후를 판단하는 역할을 했다. 나는 현대인의 꿈을 빌려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데, 이미 2세기경 달디스 Daldis의 아르테도루스 Artemidorus가 옛날 꿈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꿈의 예후(또는 사전 인지적 요소)를 제시했다. 한 남자가 그의 아버지가 집에서 불이나 불길에 싸여 죽는 것을 보는 꿈을 꾸었다. 얼마 지나서 그 자신이 플레그모네(phlegmone : 불 또는 고열을 의미)라는 병으로 죽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은 폐렴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인간과 상징>
꿈은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꿈은 무의식의 언어를 사용한다. 꿈에서는 불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고열이다. 꿈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인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의 이러한 신비적 능력을 믿는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인간이 오랜 세월을 거쳐 꿈꾸어 왔던 피안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고 온전함에 대한 열망이다.
온전함에 대한 정신의 목적지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그러한 열망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향에 대한 판타지들은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예지적 꿈은 의식이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무의식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의식적 추론 또한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추정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의 깊은 생각과 창의적인 생각들의 근원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들의 근원이자 정신의 중심으로 있는 자기(Selbst) 혹은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일이 당연하고도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영웅 신화에서 영웅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불멸성이다. 불멸성을 얻기 위해서 영웅은 자신을 희생해야만 한다. 영웅은 자아의식이고 영웅의 죽음은 자아의식의 죽음이다. 자아의 죽음을 심리학에서는 자아의 초월이라고 한다. 자아의 초월은 새로운 인격으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재탄생은 무아의식이 중심이 되는 삶이다. 자아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존재하지만 무아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식은 불멸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붓다와 그리스도를 영웅적인 것의 본보기라고 말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붓다와 그리스도로 불리는 심리학의 자기(Selbst)는 전체정신의 중심이다. 자기(Selbst)는 의식과 무의식을 동시에 함유하기 때문에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중요한 원형이다. 자기 원형 안에서 선과 악은 하나다. 그러나 자아가 원형을 밖으로 투사하면 부처는 거룩한 존재와 어리석은 중생으로 와해되고,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과 악마로 와해되면서 대극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극성의 역할이다. 태초의 정신은 무의식의 혼돈덩어리였다. 그러나 의식이 태어나고 그 본체인 무의식과 분리되면서 의식은 무의식과의 대극을 경험하게 된다. 대극이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의식성은 더욱 강화되고, 강화된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은 의식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의식화 과정은 분리된 정신이 한마음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의 분화과정을 통찰하는 사람은 그것을 대장정의 드라마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