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3. 14:21

십우도(十牛圖)와 영웅 신화

2) 십우도는 영웅 신화가 보여주는 잃어버린 모성을 찾고 있는 상像이다

 헤르만 헤세는 융 학파에게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개성화 과정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고 알려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헤세의 작품에는 정신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그의 주요 작품들에 나타나는 정신구조에 대한 상징성은 문학을 넘어 심리학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헤세의 작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Narziß und Goldmund)』에서 주인공 골드문트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골드문트의 어머니는 이교도 출신의 가난하고 야성적이었던 댄서였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행정과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민회를 소집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집정관이었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교육시켜 품위를 높여주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부인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고, 골드문트는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악평을 듣고 자라야 한다. 자신이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기에 어머니를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자신이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여기서 어머니는 무의식의 전체를 상징하는 정신적인 상像으로서 의식을 태어나게 만든 정신의 모성이다.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자아는 자신의 근원적인 세계를 잃어버린다. 자아는 잃어버린 어머니인 심혼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심혼은 모든 죄에 쉽게 빠지게 만드는 근원이자 금지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규율의 금지된 세계를 상징하는 아버지가 충동의 세계인 어머니를 길들이려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영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러나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르게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세계인 아버지는 심혼인 어머니를 쫓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지만 이성과 제도를 무너지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이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과 과정의 상징>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골드문트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란 실제로는 하나의 이마고 Imago, 단지 정신적인 상像이라는 사실이다. 이 어머니-이마고는 매우 다양하지만, 틀림없이 매우 중요한 무의식의 내용들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아니마의 원형이 처음으로 육화 된 것이면서, 심지어 무의식의 전체를 의인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퇴행은 단지 표면적으로 어머니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실 무의식적으로, 즉 어머니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새로운 인격, 즉 중생이 부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의식이라는 어머니를 만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정신의 근원을 나타내는 정신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전체성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자아는 모든 것을 외부적 형상으로 체험한다. 원형이 육신의 형상을 갖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융은 정신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자웅동체라고 말한다. 만물의 이치가 음과 양의 조화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이론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여성적 요소보다 남성적 요소가 지배적이면 남자로 태어나고, 남성적 요소보다 여성적 요소가 지배적이면 여성으로 태어난다. 남성은 남성성이 드러난 측면이라면, 드러나지 않은 여성적 요소들은 모두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여성 또한 여성성이 우세하게 드러나 있는 대신 드러나지 않는 남성성은 모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드러난 것, 즉 외면적인 것만을 인식하는 자아의식은 자기 내면에 잠재된 성질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더구나 관습적 사회의 특징은 여자에게는 여성성을, 남자에게는 남성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한 분위기는 더욱더 자신의 숨겨진 성향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적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적 인격은 자신의 숨어 있는 반대의 성을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짝을 찾아 나서는 것은 자기 내면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타인의 것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많은 이들이 이성 간의 사랑에 의해서 상처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잃어버린 것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자체가 이미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심리학적으로 퇴행 또는 내향화이다. 소를 찾으러 가는 일이 바로 퇴행이자 내향화인 것이다. 모든 종교적인 형성물은 리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융은 말한다. 소를 찾아 나서는 일도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정신적 에너지의 힘에 의해서다. 소를 찾는 일은 자신의 근원과 관계를 맺는 끈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는 무의식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소는 생명을 수태하는 상징으로서 시초의 존재를 상징한다. 무의식은 '영적인 어머니'로서 모든 것을 낳는 출산의 여신이자 영양을 공급하며 키우는 보호의 신이다. 그러나 동시에 저승의 문지기로서 죽음을 상징하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의식이 무의식을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무의식이 돌발적으로 출현한다면, 그것은 의식을 파괴시킬 수 있는 광기의 원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대극이다. 

 

 모든 심리학적 극단은 암암리에 그 대극을 내포하거나 그 대극과 가장 밀접하고도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 바로 이 대극성으로부터 그가 갖는 고유의 역동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의 대극으로 전도되지 않는 거룩한 관습이란 없는 법이다. 어떤 하나의 입장이 극단적이면 극단적일수록 오히려 대극의 반전, 즉 에 난치오드로 미 Enantiodromie가 더욱 예상될 수 있다. 최상의 것은 악마적으로 왜곡될 위협을 가장 많이 받는다. 왜냐하면 최상의 것은 나쁜 것을 가장 많이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대극과의 이와 같은 특이한 관계는 결국 언어에도 나타난다. ⦁⦁⦁⦁⦁⦁ 어떤 민담에서 '신'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다른 이본에는 악마로 표시되어 있는 것과 같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인간은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사는 존재다. 갈등만큼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갈등은 근원적 혼란이면서 현실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갈등은 정신이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극적 요소에서 온다. 대극은 정신의 본질이다.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도, 소를 찾아야 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이 갈등에 대한 근원적인 해소에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이란 진정한 악을 인식할 때 실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악을 대극으로 하는 선이란 본질적으로 악을 대치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에 집착할 때, 악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대상이 된다. 악이 밖으로 투사되어 일어나는 참혹한 결과 바로 전쟁이다. 대극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충동의 상인 소를 찾아 떠나는 이유다. 소를 찾아냄으로써 정신의 어머니인 소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신의 모습도 결국은 악으로 전도한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근원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상의 것은 악마적으로 왜곡될 위협을 가장 많이 받는다. 왜냐하면 최상의 것은 나쁜 것을 가장 많이 억압하였기 때문이다"라는 융의 말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찾는 부처가 청정하다고 믿고,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오점 하나 없이 거룩하다고 믿는다. 그러면 그는 신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쪽으로 극대화시켜서 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편향된 관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아닌 충동의 상像인 소를 찾으러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를 만나지 않고서는 부처를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신이 곧 악마이듯이 소가 곧 부처라는 말과 같다. 

 이러한 정신적 구조는 중의적 함의를 지닌 문자에서도 나타난다. 그중의 한 예로서 한문 '리離'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는 '만나다', '마주치다'라는 정반대의 의미도 있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대극의 반전 역시 정신의 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상징인 소는 자아의식이 성장과정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이고, 십우도는 자아의식이 자신의 모성을 찾고 만나고, 결국은 하나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