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웅 신화와 십우도의 차이
영웅 신화에서 영웅은 자아를 상징한다.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영웅의 출생은 비천하다. 그것은 전체성의 보호 없이는 자랄 수 없는 자아의 나약성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영웅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어 악과 싸워 승리한다. 영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보다는 그를 도와주는 후견인의 능력 덕분이다.
신의 능력을 가진 후견인들은 자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정신의 전체성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그러나 영웅은 자신의 성공이 후견인의 도움 때문이었음을 잊어버리고 성공에 도취되어 우월감에 빠진다. 그러한 영웅의 교만은 죄에 빠져 타락하거나 배신당하여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자아는 전체성의 도움에 의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영웅이 되지만 그 스스로 갖게 되는 교만에 의해서 죄를 짓거나 배신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고 만다. 자아의 교만은 자신이 정신의 중심이라는 허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나르시시즘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됨으로써 영웅의 허상을 걷어낼 수 있다.
자아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자아가 정신의 중심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나서 본래적 기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웅의 죽음은 정신의 성숙성을 나타낸다. 각각의 영웅상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개성의 발전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상징>
영웅의 죽음 방식, 즉 자아의 죽음에 있어서 일반적인 영웅 신화와 십우도의 차이를 눈치챌 수 있다. 전형적인 영웅 신화에 나타나는 영웅의 죽음은 그 원인이 교만과 배신을 가져오는 자아의 팽창이다. 그러나 십우도에서의 영웅의 죽음은 자아도 없고 공도 없는 완전한 하나로 나타난다. 이것은 자아의 팽창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축소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팽창은 자아가 자기(Self)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팽창은 자아가 전체성의 힘을 자아의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일어나는 교만이다. 그러나 십우도에서는 전체성인 자기(Self)와 동일시할 수 있는 자아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성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아가 이미 초월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성이 공空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영웅 신화가 외부적 요소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후자는 내부적 요소에 의해서 일어난다. 즉 인간은 외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을 때에도 자아의 초월이 일어날 수 있다. 외적 실패가 인격적 경험이라면, 정신적 추구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합일은 신비적 경험이다.

융 학파의 한 사람인 조셉 헨더슨 Joseph L.Henderson은 영웅 신화들이 정신적인 분화의 첫 단계로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 성인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아는 어느 수준의 자율성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전제되는 자아의 성장 과정으로서 자아가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즉 헨더슨이 본 영웅 신화는 일반적인 자아 성숙과정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팽창이 필연적이다. <인간과 상징>
그러나 십우도가 보여주는 영웅 신화의 과정에는 자아 팽창이 없다. 왜냐하면 소를 찾으러 가는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아의식이 성숙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를 찾고 길들이고 소를 찾는 자도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팽창을 가져오는 자아가 초월되어 있다. 초월이 가능한 성숙한 의식성이었기에 스스로 전체성인 자기(Self) 혹은 부처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전체성 혹은 개성화나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은 일직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의 과정 안에 있다. 흔히들 그러한 과정을 나선형적 발전이라고 표현한다. 즉 자아의식의 성숙과정은 끊임없이 순환과정을 거친다. 영웅 신화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헨더슨이 영웅 신화를 분화의 첫 단계로 보았다면, 십우도는 자아의 초월이 일어나는 분화의 마지막 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화의 첫 단계란 자아가 의식을 획득하고 의식의 주체로서 정신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단계라면, 마지막 단계는 자아의 초월이 일어남으로써 무아의식이 직접적으로 출현하는 단계이다. 무아의식에는 자아가 없다. 그러므로 자아의 팽창이 있을 수 없다.
인격의 중심이 자아에서 무아로의 이동이다. 무아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의 직접적인 대면이 일어나고,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 자아와 무의식은 관조된다. <원형과 무의식>
되돌아보는 일은 퇴행으로 이끄는 것이며 퇴행의 시작이 된다. 과거는 추억이며 어떠한 정신적인 내용, 즉 내인적 정신적(endopsychische) 요소이기 때문에 퇴행은 본의 아니게 일어나는 내향화이기도 하다. 퇴행은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인데, 현재에서는 우울증을 통해서 일어난다.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보상 현상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 보상 현상의 내용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울한 경향을 의식적으로 따르면서 그로써 활성화된 과거의 추억들을 의식에 통합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우울증의 목적에 맞는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퇴행이란 자아의 상대의식이 자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추억의 어두운 부분들은 자아를 자기 비하로 이끌게 된다. 그것들은 자아주도의 삶을 보상하기 위한 무의식의 내용들이다. 보상은 무의식의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을 때 일어난다.
자아는 비도덕적 내용들이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자아가 그러한 내용들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아가 그것들을 외면할수록 무의식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즉 우울증은 자기 내면의 문제들을 의식화하라는 정신의 신호다. 문제의 해결은 의식화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의식화는 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일어난다. 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것이 바로 자아의 초월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우울증은 단순히 정신 병리학 문제로만 볼 수 없다. 비록 시작은 우울증이지만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울증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퇴행과 내향화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퇴행이 내향화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라는 점에 주목한다. 정신분석은 퇴행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내면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를 찾으러 가는 경우는 자기 내면에 대한 탐구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퇴행을 경험하지 않고 바로 내향화한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차이를 가진다.

의식이 무의식의 보상 경향 앞에서 공포감으로 느낄 때, 무의식은 뱀의 형상으로 넌지시 자신을 드러낸다. 대개 퇴행의 경우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러나 무의식의 보상을 근본적으로 시인하는 사람은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향화를 통하여 무의식에로 향해 가는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분석을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은 무의식에 대해서 전혀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무의식은 낯선 침입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스로 소를 찾아 나선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신성한 에너지를 믿고 있으며 그 작용에 대해서 전혀 낯설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소를 탐구하는 사람은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내향화를 시도한다.
심연은 정신적 어머니의 자궁이다. 자발적으로 심연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그만큼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서 깊은 믿음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만나게 될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을 정도의 담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준비된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소를 탐구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인 심연으로 내려간 사람이고, 그는 그 자궁에서 자아의 껍질을 벗고 부화함으로써 자유로운 세상으로 비상飛上한다. 그것은 부분적이고 제한된 정신인 자아를 초월하여 전체성으로의 진입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