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우도는 재탄생 상징이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서 버려지고 양부모에 의해서 자라는 내용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즉 영웅은 낳아준 어머니가 있고, 길러준 어머니가 있게 된다.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는 육체적 삶을 주는 현실적 어머니고, 길러주는 어머니는 정신적 삶을 주는 상징적 어머니다. 양육하는 어머니가 동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동물의 상징성은 곧 무의식에 대한 표명이다. 즉 의식은 무의식의 정신에 의해서 양육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의식을 양육하는 무의식은 자아다. 자아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자아는 의식을 싸고 있는 껍질, 몸으로 말하자면 피부에 해당한다. 피부가 없다면 몸은 성장이 불가능하다. 자아는 의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머니다. 이기적 본능에 충실한 자아는 의식의 중심에 있으면서 의식을 이끌고 주도하여 그 힘을 강화시켜 나간다.
자아가 없다면 의식은 성장할 수 없다. 하지만 의식이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의식화시킬 수 있을 만큼 성숙하면 자아는 의식을 낳아준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초월이다.
영웅의 대표적 상징이 되는 고타마 붓다 역시 두 어머니를 갖고 있다. 붓다 신화에는 코끼리 형상을 한 동물이 붓다를 낳은 보살이다. 불교의 코끼리에 상응하는 기독교의 상징적 동물이 바로 힘과 순결을 상징하는 가공의 동물 유니콘 unicorn이다. 신적神的어머니를 상징하는 이러한 동물들은 육체적 인간을 영적 인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웅은 자기 자신을 정신적으로 재탄생시키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영웅은 스스로 만든 자궁에 스스로 들어가 스스로 알이 되어 스스로 알을 까고 세상에 나온다. 다시 태어난 세상은 자아의식의 관념적 세계를 뛰어넘는다. 자아의 관념적 세상이 지배하는 곳은 집단적이고 단순화된 도식에 의해서 개성이 무시되는 곳이라면, 새로 태어난 영웅의 세상은 모든 변화와 풍요로운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재탄생을 위한 자기 부화는 내부로 침잠하는 내향화에 의해서 일어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내향화를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된다. 신화가 말하는 희생의 상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분노할 기독교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융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한 말을 상기시킨다.
"육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곧 육이 되고 말 것이다. 상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너는 영이 될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이것이 얼마나 교육적이고 발전적인지 명백하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모든 존재는 자기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는 영웅이 아니라면 결코 견디어 내지 못할 만큼의 참혹한 고난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 가시면류관을 쓴 채 두 손에 못이 박히고, 허리는 창에 찔려 모든 피를 흘린 후에 죽음에 이른다.
부활은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써 주어진다. 자아의 희생은 인간 예수를 신적인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영웅의 길로 들어선 자는 언제나 예측할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기로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영웅은 그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묵묵하게 헤쳐 나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룬다.
재탄생은 죽음에 의해서만이 일어난다. 이때의 죽음은 자아의 죽음이다. 십자가 죽음의 상징은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은 자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기능이다. 자아는 삶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때 고통을 느낀다. 자아는 고통을 느낌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고통은 자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고통을 느끼는 자아가 없다면 깨달음 또한 없다. 자아가 느끼는 고통에 관한 객관적 인식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이 객관성은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이어야 한다. 무아의식은 자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 자아를 안다는 것은 본능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뿌리가 바로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영웅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다. 재탄생은 죽음과 같은 고통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웅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신적인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다시 태어남은 먼저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부활을 위해서 제물이 되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의 죽음은 신의 방식으로 부활하기 위한 의식儀式인 것이다. 부처는 자아의 희생에 의해서 정신의 주체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我)'로 대변되는 주관성을 초월하여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융은 그것을 '객관화된 자아'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성품을 본 자아', 즉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자아가 진정한 성품을 보았다면 자아는 인식의 주체가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어 성품의 객체로 돌아간다. 성품의 객체로 돌아간다는 말은, 자아는 부처 곧 자기(Self)에 의해서 관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에너지인 리비도의 흐름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근원적 존재로서 의식에 대한 무의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신화는 희생의 충동이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퇴행이 삶을 역행하고 개인 인격의 본능적인 토대에 장애를 준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결과 이에 대한 보상작용이 상용할 수 없는 경향의 강력한 억압의 형태로 생겨난다.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 즉 본능적 성향들의 충돌과 대결이다. 이에 대해서 의식적인 자아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리비도의 움직임들을 인지하지 못함으로 대개 수동적으로 내맡겨져 있다. 그래서 의식 안에서 동참하지 못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무아의식이 정신의 주체로 있는 한 자아는 하나의 기능으로 존재할 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리비도의 움직임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무의식의 영역을 자아의식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다면 자아가 그것을 미리 방어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본능적 성향들은 의식적 인격과의 충돌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은 현실 삶에 역행할 수 있는 일들을 결코 원치 않는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는 한, 무의식의 의식화는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은 영웅 신화가 왜 자아의 희생을 이야기하고, 십우도가 왜 자아의 초월, 즉 무아를 이야기하는지를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첫 번째 삶이 자아 중심의 삶이었다면, 재탄생의 두 번째 삶은 부처가 정신의 중심이 되는 삶이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 즉 소를 만나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고유의 창조적 정신이자 부처인 무아의 절대의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아가 의식의 중심이 되는 삶을 불교에서는 후득지後得智라고 부른다. 무아가 중심이 된 후득지의 삶은 자아가 중심이 된 삶과 전적으로 다르다. 자아의식이 전등 빛 정도의 의식성이라면 무아의식성은 태양의 빛에 비교되는 최고의 의식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탄생은 우주 진화론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