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호국 불교
1,700년 한국 불교 역사에서 전쟁과 관련된 애국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적을 죽이는 전쟁과 살생을 금하는 불교는 정반대이지만, 나라를 지키고 평화와 안정을 이루는 것 또한 법을 수호하는 길이었다. 한국 불교의 애국주의 전통은 왕권이 무법천지보다 우월했던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대부터 전쟁과 한국 불교의 관계를 살펴보고 '호국 불교'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삼국시대 신라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불교계 역시 애국심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법을 수호하는 대가로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팔관회는 진흥왕 재위 551년에 처음 거행되었고, 572년에는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7일간 거행되었다.
백고좌회는 진흥왕 때 전승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왕이 법을 수호하고 재앙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인왕반야경』에 근거한다. 백고좌회는 왕이 직접 주재하고 불상과 보살상 100 존을 봉안하고 100명의 고승이 모여 경전을 독송하여 국난과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호국 의식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 때는 원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이 전통은 고려 시대까지 이어졌다.
신라에서 호국을 실천한 고승으로는 호국사찰인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의한 자장, 수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작성한 원광 등이 있다. 원광은 『천하오계』에서 전쟁에서 물러나지 말고, 함부로 죽이지 말고 선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상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고, 이에 앞서 원효는 암호를 해독하여 고구려 군대의 기습 공격에서 신라를 구했다.
신라에는 과거 칠불이 법을 설한 불교 국토라는 개념, 미륵불을 믿는 군사 조직이자 낭도 집단인 화랑의 용화향도 등 나라를 수호하는 불교의 사례가 많다. 황룡사와 함께 나라를 수호하는 사찰로 유명한 사천왕사의 창건에서도 전쟁과 불교의 만남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명랑은 신라를 침략하려는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임시 사찰을 건립하고, 문두루법(門頭法)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그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 사천왕사이다.
고려와 호국 불교
고려에 들어서면서 국가와 불교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우리나라의 큰 일은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니, 선과 가르침의 사찰을 짓고 주지를 세워 이를 수행하게 하라.”
라고 했다. 고려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불교 의식이 거행되었다. 『인왕경』, 『금광명경』 등 국가의 경전을 바탕으로 나라를 호국하는 사찰과 재난과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사찰, 그리고 호국 의식이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고려사』에는 고려가 불교에 의지하여 나라를 호국했으며, 특히 『인왕경』은 호국을 위한 가장 훌륭한 경전으로 여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위기에 승려들이 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남아 있다. 1010년 거란의 침략이 일어나자 관군 9천 명이 임원역 근처에서 적군 2천 명을 참수하고 격퇴하였고, 법언 스님은 공덕을 쌓아 전사하였다. 1104년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특별부대를 창설하였는데, 여기에는 수원 출신 승려들로 구성된 반마군(反馬軍)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사찰에 배치되어 강제 노역에 종사하였다.
1217년 관군과 승려들이 연합하여 몽골군에게 밀려난 거란군을 막았고, 승려였던 김윤후는 용인에서 몽골 장군 살리타를 사살하여 승승장구하였다. 또한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나라와 백성을 호국하는 불교 전통을 계승하여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기를 기원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소탕하여 공덕을 쌓았다는 기록도 역사서에 남아 있다.
조선과 호국 불교
조선시대 전쟁과 불교의 관계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임진왜란이었다. 이는 7년간 이어진 동아시아 세계대전으로, 조선 불교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후인 1592년, 일본군은 명나라 요동으로 가는 길을 빌린다는 명분으로 바다를 건너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때 서산대사 청허 휴정은 선조에게
“늙거나 병들어 갈 수 없는 승려는 수행을 하고 신령의 도움을 빌면 되고, 나머지는 승려가 되십시오. 저와 다른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님의 은혜와 수양을 받았으니, 제 목숨을 바쳐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전국에서 5천 명의 승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평양성, 행주산성 등의 전투에서 큰 공적을 거두고 군수 물자를 공급하고 곳곳에 산성을 쌓고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선조가 한양으로 귀환할 때 호위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 기록과 태조 어진 등의 문화재를 묘향산으로 옮겨 보호했다.
사명 유정은 스승 휴정의 뒤를 이어 팔도총사령관으로 승병을 지휘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포로 송환과 국교 재개를 협상했다. 당시 승병은 전란에서 전사한 자의 장례와 혼인 송환을 담당했으며, 각지에서 혼의 안식과 저승을 기원하는 제사가 거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과 충성의 노고로 인해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불교계 역시 전쟁으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고, 수행의 쇠퇴와 세속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휴정의 제자 정관일선은
“법의 종말이 쇠퇴하고, 세상이 혼란하며,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고, 스님들도 편히 지내지 못한다. 적의 잔재와 백성들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스님들이 속옷만 입고 싸우다가 죽거나 도망치는 것이다. 스님이 되겠다는 뜻을 잊고 계율을 버리고, 헛된 명예를 바라며 돌아오지 않으니, 불풍이 곧 그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 스님들의 전쟁 참여는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명백히 어긴 행위였다. ‘살생금지’와 ‘무기 휴대 금지’의 계율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나라를 위해 전쟁에 주저 없이 참전한 의승군의 활동은 동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1624년 서울 남부의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데 의승군이 동원되었고, 이후 산성의 방어를 맡았다.
1627년 병자호란 당시 허백 명조는 8도 의승도장이 되어 평안도에서 4천 명의 승려를 이끌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벽암각성은 3천 명의 승려를 모아 말의 침략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의승의 전통은 조선 후기 불교의 생존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가는 승병과 승려의 노동인 승역을 활용하였고, 그 대가로 승려의 자격과 활동을 인정하는 공리주의적 정책이 수립되었다.
근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진 호국 불교
불교는 오랫동안 충효의 윤리적 문제와 국가 운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비판에서 벗어나 탄탄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휴정과 유정을 모시는 사당이 정부의 공식 허가와 지원을 받았고, 밀양과 해남에는 표충사, 보현사, 수충사가 건립되었다. 당시 정조는 휴정을 극찬하며
"불교는 자비를 중시하는 종교이며, 휴정은 백성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종파의 기풍을 보이며 국가 위기에 나라를 구하였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큰 공적을 세웠다. 세속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불교의 참된 자비다."
라고 말했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불교계는 국가나 민족을 수호하는 것보다 새로운 문명과 깨달음의 시대에 불교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진보 세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워 정치와 종교 분리와 사찰령 폐지를 주장했다.
실제로 근대 일본에서는 천황제 이념이 확립되고 국가가 군국주의로 전환되면서 ‘호국불교’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전시 체제에서는 천황제와 불교를 결합한 제국불교가 주창되었고, 호국 불교는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면 한국 불교사에서 호국과 호법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호국에 대한 다양한 측면과 사례가 불교의 본질적 가치와 상충될 수 있지만, 세속 권력의 힘에 맞서 자율성과 독립적인 성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호국과 호법을 동일시해 온 것 또한 동아시아 불교의 공통된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