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윤리와 승려들의 처신에 관하여
어렸을 때부터 "영웅이 미녀를 이기는 건 어렵다", "아랫도리 일은 따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남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돌았다. 물론 자유당 시절에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첩은 낳지 말자"라는 자성(?)의 목소리까지 나왔으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1970년대와 1990년대 초, 개발 시대 재벌 총수와 정치인들의 불륜과 사생아 문제는 온 나라에 거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97년 미국에서 터진 "르윈스키 스캔들"은 큰 충격이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23세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된 이 사건은 대통령 탄핵 논의로 이어졌고, 클린턴은 마침내 1998년 8월 19일 공식 사과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이 사건에 놀랐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미국의 엄격한 도덕 기준은 놀라웠다.
하지만 개인 윤리의 엄격함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 시장이 여성 문제로 사임했고,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충남도지사가 의석을 잃었으며, 서울시장이 임기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사회가 윤리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발 시대에는 능력이 뛰어나면 개인의 윤리적 문제는 능력에 묻힐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공들여 쌓은 탑은 무너진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오늘날 윤리가 충돌하면 탑뿐만 아니라 첨탑까지도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기준은 종교인들에게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스님들은 삭발과 가사(袈裟)라는 특성상 목사나 신부보다 더 투명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실 스님들 개인의 일탈이 불교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엄격함과 복장에 대한 투명성이라는 이중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최대 종교였을 때는 경허스님처럼 깨달음을 얻는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종교가 경쟁하고 모든 종교가 비종교에 밀려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비윤리적인 수단은 통하지 않는다. 즉, 오늘날 윤리가 기반이 되지 않는다면 설령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사회적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
특히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이제 전 국민은 카메라와 녹음기를 소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유튜브와 같은 개인 SNS의 발달로 개인은 자신의 의견을 파괴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 작고 부주의한 일탈은 개인의 몰락을 넘어 집단 전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 혜민 스님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다.
혜민 스님 사건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스님을 바라보는 기준에는 맞지 않았고, 결국 스님의 9년간의 노력은 여론과 개인들의 공세 속에 빠르게 침몰했다.
이는 이 사회가 스님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스님의 윤리와 도덕성은 다종교의 경쟁 속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종교는 사회를 계몽하고 이끌어가는 필연성을 지녔으며, 그래야만 종교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윤리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요, 가르침은 부처의 말씀이며, 계(戒)는 부처의 행(行)이다."라고 했다. 이는 선(禪)이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계(戒)가 승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승려의 계(戒) 문제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교육으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지름길이다.
사회의 변화와 의식주 문제
계율은 시대와 문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가 다른 문화권을 가진 동아시아에 전래되면서 승려들의 계율은 대부분 그 효력을 잃었다. 더운 인도와 다소 추운 동아시아는 기후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중국 불교는 훗날 청규를 형성했고, 이는 비슷한 위도의 한국 불교에도 전해졌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는 세 벌의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기후에서는 불가능했다. 승려들의 옷에 대해 종종
"인도에는 여름옷만 있었지만 동아시아에 와서는 여름옷만 사라졌다"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옷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도 불교의 일상복이었던 옷은 동아시아에서 의례복으로 특화되어 "공덕의(功德衣)"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세 벌의 가사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음식 또한 큰 차이를 보였다. 발우를 이용한 탁발은 더운 기후에서만 가능한 문화였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탁발을 낮은 가치로 여겼고, 탁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지 않자 현재 조계종의 ‘승법’은 탁발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이는 두 문화의 식생활이 얼마나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거와 관련된 사찰도 크게 변화했다. 부처님께서 ‘사분율’과 ‘방사건도’ 등에서 명하신 사찰의 입지 조건인 ‘마을 근처’라는 개념은 오늘날 한국 불교의 주류인 산사들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한옥과 같은 사찰의 건축 구조는 추위를 잘 견디도록 설계되었지만, 인도 사찰은 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사찰의 위치와 건축 구조 모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승려의 의식주를 현대에 맞게 재정립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그러나 이에 따른 새로운 관점과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계율이라는 종교법은 교리의 권위를 지닌 특수한 법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이성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사회적 법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과 한국 불교가 청계를 택한 이후에도 승려의 수계는 필연적으로 사분율에 기반했다. 즉, 계율의 기준이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웠을지라도, 불교에는 교리의 권위의 무게를 상쇄할 수 있는 측면이 없었다.
현대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한국 불교의 의식주 또한 급격한 변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 정의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이에 대해 종단의 심도 있는 논의와 설득력 있는 기준 제시가 필요하다. 그러나 종단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 불교가 오랜 종교적 전통으로 인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단의 무관심이 종단이 짊어져야 할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이, 개별 승려의 문제가 불교 전체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만들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된다. 다시 말해, 사회 변화 속도와 관련된 행동 양식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부처님 정신과 멘토
요즘 세상은 꼰대를 미워하고 멘토를 필요로 한다. 불교 신자들에게 부처님은 교리이자 가장 강력한 멘토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머리에 이고 다니겠다고 맹세했듯이, 불교 신자들은 부처님을 공경하고 그분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법도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는 없지만, 항상 뒤따라간다. 더욱이 종파법은 사회법보다 현실을 더 느리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종파법은 사회법처럼 구체적인 규정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처님을 공경하는 삶의 행동 규범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계율은 부처님의 정신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가치다. 이러한 측면에서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의 정신을 구현하는 ‘상통이하달(上通而下達)’의 방법도 충분히 정립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정신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방법을 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의식주 생활 속에서 윤리적 가치를 확립하는 것은 승려에게 시급한 과제이며, 가장 광범위한 가르침의 방법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고대의 율(律)로는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현실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마저도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종단이 규범을 확립하는 데 앞장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각 구성원의 도덕적 기준을 완성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머릿속에 올바른 부처상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현대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대의 시급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