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저잣거리는 자기 인식을 위한 마당이다
돈오를 근본지根本智라고 한다. 근본지는 자아의 상대의식이 알고 있는 표피적인 앎이 아니라 근본자리에서 일어나는 앎이다. 근본지는 무분별지無分別智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의 사사로운 분별이 끊어져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근본지根本智이자 무분별지 상태에서 일어나는 수행이 바로 후득지後得智다.
사전은 후득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근본지에 이른 후에 얻는 지혜라는 뜻. 모든 분별이 끊어진 경지에 이른 후에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모든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깨달음에 이른 후에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
<시공 불교사전>
즉 무분별지는 무아의 절대의식이다.
무분별의 앎은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다. 차별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의 분별기능에 의해서 무의식은 대극으로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아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무의식을 명상하는 것이다. 후득지에서 일어나게 되는 무아의식의 관조 대상은 자아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 저잣거리로 돌아오는 것이 외부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직 자기 내면의 중생들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에 저잣거리 주막 앞에서 술병을 들고 서 있는 그림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돈오는 중앙으로의 집중이 일어난 것이다.
순환적 발전은 중앙으로서의 집중이 일어났을 때만이 가능하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융은 내적 발전을 나선형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불멸성은 멈추지 않는 시계이며 창공과도 같이 영원히 순환한느 만다라다. 왜냐하면 우주적 측면은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가는 것"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환적 발전 과정에서 언제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다시 돌아온 그 지점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인격의 탄생은 완전히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에서는 '나'가 무엇인지 '나'의 본성에 대해 절실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질펀한 삶이 리얼하게 펼쳐질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마음의 보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상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자아의 상대의식이 경험하던 현실적 세계와 무아의 절대의식이 경험하는 현실적 세계는 전적으로 다르다. 자아의 상대의식에서의 경험에서는 '나'를 경험할 수 없다.
반면에 무아의 절대의식은 존재 그 자체를 경험한다. 자아의식의 관념적 시각 안에 갇힌 부분적 경험이 아니라, 무아의식의 통찰에 의한 전체적 경험이다. 온전한 경험이 가능한 것은 자아에 의해서 조금도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자극을 받는다. 자극은 자아와 연결되어 있는 무의식의 내용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은 다음 세상이 필요하고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다.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어두운 성질들, 즉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자아인격인 '그림자'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 안에서는 자아인격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다. 왜냐하면 자아로서는 그것들을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아와 무의식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자아의식은 무의식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무의식의 뿌리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모든 과정을 무아의식은 관조하게 된다. 무아의식의 관조가 진정한 무의식의 의식화이자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이며 한마음(一心)이다.
한마음으로 통합되면 그림자는 더 이상 밖으로 투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신의 열등기능은 고유성을 회복하여 창조적 활력으로 되살아난다.
분화되지 않는 본성의 동물적 성향들은 단순히 생명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의식화에 의해 인간적인 것으로 변환하게 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대사가 말했다. 여러분(大家), 여러분이 (지금)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생물은 한량이 없으나 반드시 구제하고자 맹세합니다"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혜능)가 여러분 마음속의 '생물(중생)' 따위를 구제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릇되고 진리를 간직하지 못하는 마음씨, 거짓되고 황당한 마음씨, 좋지 못한 마음씨, 남을 헐뜯는 마음씨, 남을 미워하는 마음씨, 이러한 마음씨들은 모두 마음속에 깃들인 '생물'들이란 말이다. 이런 것들은 각자가 반드시 자기 본성에 의하여 스스로 구제해야 하며, 이를 참된 구제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일컬어 자기 본성에 의하여 스스로 구제한다고 하는가?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비뚠 견해라든가 헤맴이나 어리석음이라는 생물 따위를, 바른 견해(정견正見)로서 구제함을 말한다. 이미 바른 견해(판단력)가 있으므로 그 청정한 지혜를 작용하여 어리석음과 헤맴 같은 모든 '생물 종류'를 깨뜨림으로써, 각자가 스스로 구제하는 것이다. <육조단경>
생물이란 살아있다는 말이다. 즉 마음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아 역시 무의식이다. 이 무의식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이 무생물이거나 생명이 없다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의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끄럽게 요동치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의식에게 알리고자 함이다. 무의식의 외침은 바로 의식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구제하지 않는 한 의식의 혼란과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속의 오래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는 이유다.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아서 무의식이라고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다. 무의식은 살아있기 때문에 의식에 의해 무시받을 때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은 미움⦁거짓됨⦁꾸밈⦁질투⦁황당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의식을 밀고 올라와 완벽하기를 끊임없이 꿈꾸는 자아의식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중생은 밖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혜능은 분명하게 말한다. 자기 자신 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생물들은 자아의식에 의해서 억눌려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 작용력이 막강하다. 그것들은 반드시 중심에너지인 무아의식에 의해서 구제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후득지가 필요한 이유다. 왜냐하면 저잣거리는 자아를 통해서 무의식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미트라스 희생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교하면 기독교적 상징의 우월성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나타난다 : 그것은 동물로 묘사된 동물적인 충동성만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 모습의 상징이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자연적인 인간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직접적인 통찰이다.
전자가 동물적인 충동성, 즉 종種의 법칙에 전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묘사한다. 그에 비해서 자연적인 인간은 그것을 넘어서 인간 특유의 것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 법칙이탈능력, 종교적으로 말하면 '죄'를 지을 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항상 다른 길을 열어두고 있는 이러한 가변성은 주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정신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리한 점은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본능에 의해 설정된 절대적이고 믿을 만한 길잡이도 억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인원에서도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학습능력에 의해 억압된다는 것이다.
본능의 확실성 대신에 불확실성이 등장한다. 그럼으로써 인식하고 평가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식이 요구된다.
만일 의식이 본능의 확실성을 성공적으로 보상한다면, 의식은 점점 더 많이 믿을 만한 규칙과 행동방식들로써 본능적인 행동과 직관적인 탐지를 대체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의식이 자신이 본능적인 토대와 분리된다. 그리고 자연의 충동 대신 의식된 의지를 내세우는 대립적인 위험이 나타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사실 불교의 '나(我)'와 심리학의 자아自我는 그 강조점이 약간은 다르게 나타난다. 불교의 '나'는 본질적 특성이 더 강조되는 반면, 심리적 자아는 기능적 특성이 더 강조된다. 불교의 궁극적 추구가 '나'가 아니라 전체성인 부처에 있었다면, 심리학의 접근은 존재에 대한 이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동물적 본성의 총합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관五官의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다. 즉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가 근원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작용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무명無明이라고 부른다. 무명은 '나'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의 한 측면이다. 이러한 '나'의 특성은 모든 번뇌와 악업惡業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정신에는 그 나를 뛰어넘으려는 '의식된 의지'가 존재한다. 그 '의식된 의지'가 꽃피워낸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八正道다. 불교의 중요한 교리인 팔정도는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여덟 가지 덕목으로 되어 있다.
① 정견正見 : 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 : 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 : 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 : 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明 : 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 :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 :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 :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이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나(我)가 가지고 있는 동물적 성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동물적 본성인 나를 극복한 사람을 불교에서는 화신불과 보신불이라고 한다. 소를 찾아 길들이고 소를 타고 집으로 온 것은 '의식된 의지'를 가진 '자연적인 인간'으로서의 사람이다. 즉 우리가 자아自我를 이야기할 때, 아我가 동물적 성질이었다면, '자연적 인간'은 바로 자自에 해당될 것이다.
법칙이탈능력, 즉 '죄'를 지을 능력은 바로 자유의지이고 자아의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뒤에 이어지는 바와 같이, 정신적인 발전 가능성은 결국 의식 작용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본능의 절대성마저도 억압한다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미트라스에서 황소의 희생이 오직 동물적인 충동성에 국한되어 있다면, 자연적인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아의식의 희생까지 기꺼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깨달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주체가 바로 '의식된 의지'다.
그러나 무아의식이 출현하면 깨달음에 대한 '의식된 의지'조차 초월되어 버린다. 깨달음도 깨달음 아님도 없다. 즉 소도 없고 사람도 없다. 의도된 의식성의 주체로서의 사람 그 자체마저 초월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된 의지' 역시 자아라는 것을 말해준다.
'의식된 의지'마저도 초월한 것을 불교에서는 법신불이라고 부른다.
"자연적인 인간을 희생함으로써 이러한 목적에 도달해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희생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의식의 지배적인 관념이 전적으로 자신을 관철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의 본성을 이런 뜻에서 형성하기 때문이다. "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자기 관조로서의 절대적 객관성의 출현이다. 그러므로 소와 자신을 나누어 보는 그 최소한의 분별의식조차 초월이 일어난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자아가 정신의 주체로서 자신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소의 충동성을 넘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전체정신에 있어서 하나의 기능으로서 본래의 역할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는 자아를 은폐할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자아는 그 자체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종種의 법칙에 속하는 동물적인 충동성뿐만 아니라, 그러한 충동성의 본능적 토대와 분리시키고 자아구조를 강화한다. 그리고 초월을 가능하게 했던 '의식된 의지'까지도 명료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십우도에서 저잣거리로 돌아오는 것이 외부의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면 그것은 화신불과 보신불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부의 중생을 구원하는 것으로 풀이한다면 법신불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