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후득지는 '근원적인 마음(orginal mind)'이 심각한 자기반성을 거치는 과정이다
중생은 외부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존재들이라는 것은 아래 혜능의 법문에서 더 분명해진다.
중생이 끝이 없지만 맹세코 다 제도하기를 발원합니다. 번뇌가 끝이 없지만 맹세코 다 끊기를 발원합니다. 가르침이 끝이 없지만 맹세코 다 배우기를 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다 이루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 중생이 끝이 없지만 맹세코 다 제도하기를 발원한다고 한 것은 혜능이 제도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중생은 각자 자신의 몸에 있는 자성이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무엇을 자성이 스스로 제도한다고 하는가? 자신의 색신 중에 있는 삿된 견해와 번뇌 그리고 우치와 미망은 스스로 본래 깨달음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견으로서 제도해야 한다. 이미 정견인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 우치와 미망을 제거하면 중생은 각자 스스로 제도한 것이다. 삿된 것은 바른 것으로 제도하고, 악은 선으로 제도하고, 번뇌는 보리로 제도한다.
이와 같이 제도하는 것이 참된 제도이다. 번뇌가 끝이 없지만 맹세코 다 끊기를 발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허망을 제거하는 것이다. 가르침이 끝이 없지만 맹세코 배우기를 발원하는 것은 위없는 정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다 이루기를 발원한다는 것은 항상 자신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경하는 것이다.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으면 반야가 생겨난다.
미망을 제거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도를 깨닫는 것이며, 서원의 힘을 이루어 행하는 것이다.
<돈황본 육조단경 연구>
내면에 있는 중생들은 '삿된 견해와 번뇌 그리고 우치와 미망'이다. 이것들이 어리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혜의 싹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혜는 어리석음을 깨우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삿된 견해와 번뇌 그리고 우치'는 자아의 내용이다. 자아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 저잣거리다. 그러므로 저잣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자성이 스스로를 제도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을 융의 언어로 바꾸면 '삿된 견해와 번뇌 그리고 우치와 미망'은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다. 근원적인 마음은 무의식이다.
근원적인 마음이 심각한 자기반성을 거치지 않으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동물적 심리상태인 집단무의식을 말한다. 집단무의식은 집단정신을 낳는다. 집단정신은 집단의 일부일 뿐이다. 집단의 정신 수준 상태는 비록 개별 존재이지만 자신의 개인성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라고 융은 설명하고 있다.
고타마 붓다가 태어나면서 천상천사 유아독존을 외쳤다는 말은 정신기능의 가장 위대한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만이 유일한 개인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개인성이란 정신의 고유성이다. 고유성은 오직 자신을 의식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위대한 고유성은 의식의 태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부처가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고유성과 융이 말하는 개성화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에서 '고유한 인간'으로의 변환이다. 그러므로 동물적 집단 심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변환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무아의식의 출현이다. 그런데 무아의식이 출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단번에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의식이 추정 불가능한 엄청난 역사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능은 그것을 '천년의 어리석음'이고, '만년의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한다. <돈황본 육조단경 연구>
정신의 역사를 관조하는 과정 또한 얼마가 걸릴지 모른다. 그러므로 혜능이 중생의 제도가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무아의식은 그 또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년의 어두움'이고, '만년의 어리석음'을 구제하는 일은 인간 정신에 숙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미트라스 희생제의는 아직 고태적인 동물 희생을 통하여 상징화되어 있고 오직 충동적인 인간을 길들이고 훈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에 비하여 기독교적인 희생의 사상은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하여 구체화되어 전 인간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적인 충동성을 길들일 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의 전적인 포기와 이를 넘어서 인간 특유의 정신적인 기능들을 초세계적인 정신적 목표들을 향해 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자연, 그리고 자연 전체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강한 훈련이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전적으로 가능했고, 세기가 거듭되면서 하나의 의식의 발전으로 인도했다. 의식의 발전은 이러한 수련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발전들은 결코 임의의, 혹은 지적인 고안과 환상들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내적 논리성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 말의 희생이 생물학적인 충동 성향의 포기를 상징화한다. 반면에 영웅의 희생에는 인간의 자기희생, 단순한 자아성의 포기라는 더 심오하고 윤리적인 값진 의미가 있다. •••••• 그러므로 말의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는 동물의 희생에서 인간의 희생으로 나아가는 것 ••••••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미트라스의 희생제의가 단순히 동물적 충동성에 대한 훈육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 특유의 모든 것, 즉 자아세계의 모든 욕망에 대한 희생이다. 미트라스의 희생에서는 소는 없고 사람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희생에서는 소도 없고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아의식으로서의 변환이다.
소(我)도 없고 사람(自)도 없는 공空이다. 드디어 무아의식이 나타났다. 소(我)를 더 이상 길들여야 할 필요가 없어 채찍을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상태의 성숙한 자아의식의 상태로서 이미 화신불, 보신불이라 부를 수 있다. 화신불과 보신불의 상대의식에는 여전히 부처와 부처 아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마련이다.
팔정도는 모두 법칙이탈능력, 즉 '죄를 지을 능력'을 가지고 실현하는 '의식된 의지를 가진 자연적인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팔정도를 이루는 것도, 소를 찾아 나서는 것도 '의식된 의지를 가진 자연적인 인간'이다. '의식된 의지'에 의해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희생되고, 의식의 지배적인 관념에 의해서 팔정도는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팔정도의 달성은 의식이 엄청나게 강화된 상태다. 의식의 강화는 의식의 협소한 결과로 일어나는 소심함이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깨달음에 있어서 강력한 의식성은 필수적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나약한 자아의식으로는 무의식의 엄청난 힘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의식과 대면했을 때, 무의식의 위험한 심연으로 쉽게 빠져들게 된다.
심리적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무의식과의 대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정신적 성숙함은 필수적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러나 팔정도를 얻는 것 또한 결국은 '의식된 의지'를 가진 '자연적인 인간'이다. 이 과정은 본능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억압이다. 이것은 '의식된 의지'를 가진 '자연적인 인간'이 자아의 상대의식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을 훈련시키는 과정이지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은 아닌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먼저 소를 잡아, 길들이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단계에서 출현하는 무아의식에 의해서 일어난다.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공絶對空의 단계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다. 아니 그 하나라는 생각조차 없다. 왜냐하면 무아의식이 정신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아의식은 소를 찾고 길들인 '의식된 의지를 가진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재탄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의식은 밖에 있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고 거리로 나서고자 하는 의도된 생각조차 없다. 그가 저잣거리로 돌아온 것은 후득지를 위한 것이다. 후득지는 무아의식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관조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즉 자기 내면의 집단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인연의 흔적들, 혜능이 말하는 어두운 내면에서 기나긴 역사를 만들어왔던 생명들을 구제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의 크기는 원효가 『대승기신론소』에서 밝힌 바대로 바다와 같아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융은 완전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완전함이란 무결점의 모자람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무결점이란 결점이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완전이라는 말은 상대의식의 관점이다. 깨달음이란 상대의식을 초월하여 있기 때문에 완전함도 불완전함도 없다. 깨달음의 과정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개성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로 일어나는 한마음이다. 한마음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열 번째 십우도가 타인을 구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는 부처와 조사가 말하는 성문聲聞의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성문의 목표점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고통의 굴레에서 헤매고 있는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러 가야 하는 보신불과 화신불이다. 하지만 십우도에서는 이미 절대공이 나타났다. 절대공 안에서는 구제의 주체와 구제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신불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를 잡고 길들이고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그 사람조차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경험의 주체로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아는 경험 이전의 자연인으로 돌아오지만 정신의 주체가 아니라 정신의 객체로서 기능한다. 정신의 객체란 정신의 주체인 무아의식에 의해서 관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신불과 보신불의 염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목표를 두지만, 법신불은 그 어떤 인위적인 목표도 없다. 그는 오로지 그일 뿐이다. 그에게는 앉고, 서고, 행동하고, 잠자는 모든 일상의 일들이 명상이다.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모든 감정들, 삶과 죽음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조차도 모두 명상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아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자아의 작용은 깊은 어둠으로 있던 무의식의 내용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황벽은 자아의 이러한 작용이 없으면 무아의 절대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아의식은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 일어나는 빛, 즉 의식성이기 때문이다. 무아의식은 자아의 모든 움직임을 절대적 객관성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 이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만이 본질에 대한 명료하고 진정한 이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지의 무거움과 동물적인 근원적 존재의 환상성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정신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용인이다. 어머니 세계의 응답은, 그 세계를 아버지의 세계와 갈라놓는 틈이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양자를 합일合一할 수 있는 싹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질은 구별이다. 의식을 하기 때문에 대극은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연에 거슬러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본래 대극은 서로를 추구한다. - '양극은 서로 통한다.'
무의식 속에서도, 특히 단일성(Einheit)의 원형인 자기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성의 내부에서 그러하듯 자기 속에서는 대극이 지양된다. 그러나 무의식이 표명되기 시작하자마자 마치 창조가 이루어질 때처럼 그것의 분열은 시작된다. 모든 의식화 행위는 일종의 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우주 진화론적 상징은 바로 그러한 심리학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의식과 무의식은 근원적 존재 안에서 하나였지만 그 자체로는 혼돈이다. 그러므로 질서로 성장하기 위해 두 개의 정신으로 갈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통합하는 것도 이미 근원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아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식에 의해서만이 대극은 지양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아의식의 출현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물론 자아의식의 상대의식 관점에서는 인식주체라는 역할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완성이라는 의미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아의식에서는 깨달음의 시작이나 끝이라는 생각조차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무아의식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숙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살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정신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세상에 홀로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기 싫어하듯이, 나약한 자아일수록 평화와 휴식에 매달린다. 그러나 평화와 휴식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무감각이고 마비다.
개성화 과정은 평화나 고요함이 아니라 무의식과의 투쟁이다. 물론 이 투쟁이라는 말은 자아의식에게 해당한다. 그러나 한마음을 경험한 자아는 자연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즉 무아를 경험한 자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의식인 부처가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유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후득지란 생멸문에서 본 무분별지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심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신현상 속에 은폐되어 있는 존재의미를 간파하고 체험하는 것이 후득지이다. 그 간파하고 체험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가능하고, 그 드러난 존재는 무분별지이다. 존재가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관계가 후득지이다. 그리하여 지止에 근거한 봄, 지止가 지止를 보는 주객일여, 즉 정관正觀의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융 심리학과 동양사상>
여기서 생멸문은 자아다. 그러므로 무분별지라는 말 또한 자아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무아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분별조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후득지는 자아의식으로는 알 수 없었던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며 그것을 철저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자아의 상대의식은 무의식에 대한 깊은 두려움 때문에 정신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이 드러나야만 정신은 더 이상 은폐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난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했다는 것으로 전해지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모든 대상은 자아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재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후득지는 자아가 자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부처를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버려야 할 것이 없다. 존재의 역사가 기록된 마음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한다면,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움직여야 부처도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자아가 활동하지 않는다면 부처 또한 없다. 즉 인위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된다.
고요함이 부처라면 모든 무기물은 부처여야 한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고요함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은 자아의 힘을 기르기 위한 집중수행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닌 것이다. 최종 목적지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위해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한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세상이 만들어내는 자극에 의해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다. 자아를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으로 명상하는 것이 바로 부처다. 자아가 고요함에 잠들어 있다면 부처도 역시 잠들어 있다. 자아와 부처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자아와 부처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를 잠들게 할 것이 아니라 자아를 활발하게 살려야 한다.
자아가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자아는 더 이상 팽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견성한 자아는 자신이 정신의 주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자아의 모든 활동이 관조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요함에 대한 애착이 없듯이, 그와 같은 관조에 대한 애착마저도 없다.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난다.
고요함에 대한 집착은 심각한 자기반성에 대한 거부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 심각한 자기반성을 거치는 과정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근원적인 마음'이 심각한 자기반성을 거침으로써 '고유한 인간'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