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2. 19:40

3. 견우 : 소를 보다

1) 소는 자아다

자아는 자기 보존본능이다. 그런데 자기 보존의 본능 역시 수많은 정동의 한 원천이다.  <상징과 리비도>

 

사고⦁감정⦁의지와 같은 여러 작용은 '나'를 인식 중심에 두는 자아에 의해서 일어난다. 즉 자아는 이러한 작용들의 주관자이다. 정신분석에서 규정되는 자아 기능의 핵심적 요소가 바로 방어다. 

 자아의 기능은 원시적 충동과 현실적 외계와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부여한다. 즉 원시적 충동인 이드의 욕구에 제동을 걸어 그것을 결과로 그것의 결과로 일어나는 고통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 핵심 기능이 자기 보존에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다시 말해서 존재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이 기능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잘 길들여진 자아(atta)가 인간의 영광이네' , '실로 자아(atta)가 자신의 의지처이다'라고 말한다.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이것은 자아를 길들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자아는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다. 또한 자아가 자신의 의지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지처란 깨달음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자아의 상대적 의식이 있음으로써 무의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중생이 곧 부처'다. '잘 길들인다'는 말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화다. 자아와 그것에 연결된 무의식을 의식화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아我가 없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아我가 없는 것은 아니니, 어떤 것이 아我인가? 만약 어떤 법이 충실하고(實) 참되고(眞) 늘 그렇고(常) 의지하더라도(依) 주체적이어서(主) 그 성품이 변화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아我라고 한다. ⦁⦁⦁⦁⦁⦁ 여래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위하는 까닭으로 모든 법 가운데 진실로 아我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我라고 하는 것은 곧 여래장如來藏이니, 일체의 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을 가진 것이 곧 아我라는 뜻이다.  <대열반경>

 

아我는 심리학적으로 자아다. 자아에 대한 융의 이론으로 붓다의 말을 이해해 보자. 즉 붓다의 말에 의하면 자아는 주체적이어서(主) 그 성품이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자아가 확고하게 짜 맞추어진 콤플렉스라고 하는 융의 자아개념과 동일하다. 

 정신이 분화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확고하게 짜 맞추어진 자아의 구조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아의 구조가 튼튼해야만 무의식이 의식으로 밀려 들어올 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아 구조가 약한 경우에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자아는 해체되어 버린다. 즉 자아의 구조가 사라지면 자아에 연결되어 있는 의식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무의식화 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이 무의식화 되는 일은 의식 수준의 저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신경증적 해리, 정신분열적 분해, 그리고 심하면 자아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아의 권력본능에 의해서 자아는 자기(Self)와 동일시된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부처나 예수의 대변자로서 미륵불이나 재림예수가 되었다는 환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아와 부처의 동일시는 자아의식의 말소다. <원형과 무의식>

 

경남 청도 운문사

자아의식의 말소는 정신의 과대망상이자 정신의 파멸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자아의 튼튼한 구조다. 그렇게 되어야만 무의식의 힘에 압도되지 않고 무아의식이 정신의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말소는 자아의 초월이 아니다. 자아의 말소가 정신의 붕괴라면 자아의 초월은 정신의 온전한 건설이다. 왜냐하면 자아의 초월에 의해서 전체성의 중심인 무아의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아의식은 절대의식이자 절대적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관조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가 말소된다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깨달음은 부처가 자아를 명상하는 것이다. 무아의식이 드러나면 자아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세계가 걷어지면서 정신의 실재가 드러나게 된다. 즉 심리학이 말하는 무의식의 의식화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무의식의 내용들을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자아구조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어떤 법이 충실하고(實) 참되고(眞) 늘 그렇고(常) 의지하더라도(依)' 자아가 주체적으로 있어서 변하지 아니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데 자아와 자기가 동일시되면 자아는 주체성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고한 자아의 구조는 전체성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무의식을 의식화할 때 그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의식의 내용들을 또렷하게 의식화함으로써 무의식의 의식화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형과 무의식>

 

일반적으로 '나가 없다' 혹은 '무아'라는 말에서 해석의 혼란이 일어난다. '나'가 없다는 말은 인식주체로서의 '나'가 만들어내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그런데 정말로 '나'가 없다고 생각하여 '나'를 버린다면 그것은 병적인 장해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나'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버리는 것이다. 

 자아는 정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 즉 피부와 같다. 피부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피부는 전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흔들리면 자아에 연결된 의식 또한 흔들린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쉽게 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아의 확실한 주체성, 그것이 바로 부처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트라스와 유사한 인물은 태초의 인간, 가요마르트 Gayomart이다. 그는 자신의 소와 함께 창조되었다. 그리고 둘은 행복하게 6천 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황도대에 위치한 천칭자리(Libra)의 시대로 접어들자, 악의 원리가 침입하였다. 천칭자리는 점성술적으로 소위 비너스(금성)의 좋은 거주지이므로 악의 원리는 어머니의 성애적인 면을 의인화한 사랑의 여신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러한 측면은 정신적으로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아들에게 전형적인 파멸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에 의하여 30년 후에 가요마르트와 그의 소가 죽었다. (자라투스트라의 시험도 30년이 걸린다.) 죽은 소에서 55개의 곡식의 종류와 12가지의 약초 등이 나왔다. 황소의 정자는 정화하기 위하여 달로 들어가지만, 가요마르트의 정자는 해로 들어간다. 이러한 경우 황소는 숨겨진 여성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것 같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천칭자리에 와서 악의 원리가 침입하였다는 것은 의식의 발전이 또렷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악을 구분하여 그것의 침입을 아는 것이 바로 의식이기 때문이다. 악의 원리가 침입하기 전까지, 즉 의식이 악을 구분하기 전까지 소와 함께 창조된 가요마르트는 6천 년 동안 무의식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가요마르트와 소가 죽어서 소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곡식과 약초를 만들어내는 생명체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소의 정자가 달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가요마르트의 정자가 해로 들어갔다는 것은 의식성을 의미한다. 즉 가요마르트와 소의 죽음은 의식의 분별로 인해 전체성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소는 분명하게 무의식을 의미하고 있다. 가요마르크가 해로 들어간 것처럼, 미트라스의 이름 또한 태양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인 미르 mihr와 관련이 있다고 융은 말한다. 

 그런데 소는 어떻게 자아이기도 한 것인가? 영웅은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자이면서 동시에 희생되는 자로서, 제물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소의 희생 후에 놀라운 생산력이 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원시단계에 생명력은 소모되고, '나쁘게' 되거나 상실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마다 새롭게 갱신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있었다. ⦁⦁⦁⦁⦁⦁ 그래서 미트라스 제식에서 황소의 죽음은 무서운 어머니, 즉 무의식에 바쳐지는 제물이다. 무의식은 의식이 그의 뿌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신들의 능력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식의 에너지를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신들의 힘이 없이는 모든 생명은 메마르거나 왜곡된 발전에 이르러 파멸적인 걸과 속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희생으로 의식은 그의 소유와 힘을 무의식을 위해 포기한다. 이로써 하나의 대극의 합일이 가능하게 되고, 그 결과는 에너지의 해방으로 나타난다. 희생의 행동은 동시에 어머니의 수태를 의미한다. 지하의 뱀의 악령은 피를 마신다. 즉 영웅의 영혼을 마신다. 그럼으로써 생명이 불멸의 상태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태양처럼 영웅도 자기희생과 어머니에게로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스스로를 다시 생산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황소가 무의식에 바쳐지는 제물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황소는 곧 자아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자아가 황소의 모습을 한 것은 그것의 뿌리가 동물적 본능에 있고 그것에 의해서 끊임없이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즉 자아는 본성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는 것은 본성을 안다는 것이다. 본성에 대한 이해는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다. 의식이 무의식을 위해 자신의 소유와 힘을 포기하는 이유는 신성이 무의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은 바로 소유와 힘을 가진 자아의 의식이다. 즉 자아의 초월이 일어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은 합일이 일어난다. '어머니의 수태'는 자아가 죽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생명은 부처인 무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이 선령善靈의 세계만을 추구했다면, 재탄생은 악령惡靈의 세계도 함께한다. 이것을 융은 영웅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즉 영웅의 영혼이란 선한 측면만이 아니라 악의 측면을 포함하는 전체성의 세계임을 알리고 있다. 영웅의 재탄생이 왜 불멸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하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선과 악의 이원적 세계인 자아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선과 악의 모든 이원론적 세계를 초월하는 무아의식의 세계이다. 그것은 오직 영웅만이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불멸의 세계는 오직 자아의 초월을 의미하는 자기희생과 의식의 어머니인 무의식의 세계로 귀향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즉 자아의 죽음의 대가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아의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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