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2. 20:52

3. 견우 : 소를 보다

2) 소는 자아이면서 동시에 부처이다

 "자기(Self)는 원시적 상태이고 시공간을 넘어서며, 사람의 마음에 존재해 정신적 전체성으로 향하게 하는 선천적인 잠재성이다."   <곽암의 십우도十牛圖 : 분석심리학적 고찰> , 이부영

 

융이 말하는 자기(Self)는 불교의 불성이다. 불성이 원시적 상태에 있다는 말에서 십우도가 왜 깨달음을 위해서 '소'를 찾으러 간다는 상징을 묘사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다. 자기(Self), 곧 불성은 원시성의 에너지이며 원시성의 리비도로서 충동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을 임제는 '거친 풀'이라고 하고, 조주는 '차디찬 샘물'이라고 했으며, 조주의 스승인 남전은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라고 했던 것이다. 조주의 스승은 남전선사는 신성한 법당에 물소를 들여놓았다. 동물의 원시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처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행위로 보여준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내면의 동물적 원시성을 보고 의식화하는 것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조주는 아무 말 없이 법당에 있는 물소에게 꼴을 가져다주었다. 스승의 행위가 본성에 대한 바른 통찰을 일으키고자 하는 선지식의 탁월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제자인 조주는 알아차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우도의 소는 부처를 상징하고 있다. 사람이 소를 본다는 것은 부처가 부처를 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찾아 나선다. 그에게는 부처가 존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소를 만나기 이전의 사람에게 소는 부처로 상징될 것이다. 

 

 그러나 소를 찾은 사람에겐 소는 부처가 아니라 자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는 무아의 절대의식이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 중심에 두는 자아의 상대의식은 주관적 인식이다. 주관적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 그러나 무아의 절대의식은 절대적 객관성이다. 거울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수정하게 된다. 이것을 십우도는 소를 길들이고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표현한다. 

 융은 집을 존재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 그 집의 주인은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아니라 부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해석이 가능할까? 중생, 즉 자아와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상대의식이다. 그러나 자아가 인식주체임을 초월하여 객관화된 것이 바로 무아의식이다. 즉 자아는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자아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非一非二)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부처와 자아는 하나의 기능으로 되어 있지만 그 역할은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아는 서양심리학의 에고 ego가 변역 된 것이다. 서양에서 자아는 주로 자존심⦁자부심과 같이 '나(我)'를 중심으로 하는 뜻을 상징하지만, 철학적 측면에서의 자아는 초월적 주체로서의 자아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한문으로 번역되는 자아自我에도 본연本然, 시초始初와 같은 뜻을 담고 있는 '자自'를 넣었을 것이다. 

 자아가 갖는 의미를 되짚어 풀이해 보는 것은 자아에서 아我의 특징이 빠지면 그것이 바로 자自 인 본연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신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처와 중생은 함께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이다. 그러나 부처가 정신의 주체로 있는 사람에게 부처와 중생은 한마음이다. 여기서 바로 자신이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과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사는 사람의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실 소가 부처라면 자아가 부처를 타고 길을 들인다는 말이 된다. 자아가 부처를 길들인다는 것은 이미 무엇인가 크게 어긋난다. 소는 자아이자 동시에 본능이다. 이것은 자아의 뿌리가 무의식이며 본능에 기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소를 찾는 일은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이다. 자아와 부처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다만 그 역할과 기능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음의 참다운 상태를 알기 위해 자기 마음의 소우주적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선禪불교의 대가인 스즈끼(D.T. Suzuki) 교수는 이것이 자기 존재의 내적 본성 속에서 '한마음'을 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논문에서 "개인의 마음은 다른 마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라고 가르치듯이, 소우주적인 마음은 대우주적인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둘은 초세속적인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실체이다. 수행자의 모든 목적은 무지의 짙은 안대 속에 가린 소우주적인 마음을 그것의 대우주적인 마음과 결합하여 모든 이원성과 환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불교 그 자체를 이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요가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깊은 내관에 의지해야 한다. 붓다는 이렇게 발했다. "지식 없이 명상 없고, 명상 없이 지식 없다. 지식과 명상을 함께 지닌 자는 열반에 가깝다."     <티베트 해탈의 서>

 

여기서 소우주는 자아이고 대우주는 자기(부처)다. 즉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우주인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것의 관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부처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고, 본질인 부처를 알기 위해서는 본질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인 자아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충동력, 생명력이라는 근원적인 힘 역시 본질의 현상인 자아로 표명된다는 점이다. 자아를 관조하고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마음탐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심적 요소는 자아와 본능의 주인인 부처 혹은 자기(Self)로 되어 있다. 이것은 소가 객관성과 주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소는 위험한 짐승으로서 거침없는 충동성이기도 하지만, 그 충동성을 억압하는 계율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소를 잡아타고 그것을 길들이는 것은 동물적 충동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계율의 힘을 정복하는 것' 또한 극복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본질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다. 왜냐하면 계율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이원화를 만들어내는 근원이다. 선과 악의 이원화를 극복하는 것 또한 단호한 개혁이다. 선이 선으로 고정화될 때, 선의 반대편에 있는 성질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차단될 수밖에 없다. 계율을 지키고자 하는 것 또한 정신의 한 측면만을 지향志向하는 일이다. 계율에 대한 집착은 전체성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은 충동의 힘을 극복하면서도 그 충동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충동에 대한 이해는 동물적 충동을 직시하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직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십우도의 세 번째 그림에는 목동이 소의 꼬리를 보고 따라가고 있다. 소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머지않은 곳에 소가 있었고, 드디어 소의 위풍당당함을 본다. 

 

전남 순천 송광사

 

제 3 송 : 견우見牛

 

 黃鸚枝上一聲聲 (황앵지상일성성)

 日暖風和岸柳靑 (일난풍화 안류청)

 只此更無回避處 (지차갱무회피처)

 森森頭角畵難成 (삼삼두각 화난 성)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 지저귀고

 햇볕 따사하고 바람 서늘한데 언덕엔 푸른 버들

 더 이상 피할 곳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나무와 숲을 상징하는 녹색은 무의식을 상징한다. <원형과 무의식>
새는 영웅이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다.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드러내는 성스러움도 새로 상징된다. 새는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이기도 하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노란 꾀꼬리는 모습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른두 가지의 소리 굴림을 가졌다고 알려질 만큼 맑고 다양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꾀꼬리 목소리의 다양성은 변화무쌍한 마음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다양한 특성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때,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했던 마음의 소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본질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어리석음의 근원이 아니라 지혜의 근원임을 알게 되니 꾀꼬리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상징과 리비도>

 

日暖風和岸柳靑  햇볕 따사하고 바람 서늘한데 언덕엔 푸른 버들



 햇살은 따뜻하지만 아직은 바람을 데울 만큼 강렬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발아와 생장生長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바람이 서늘해도 언덕에 있는 버들가지는 푸르게 돋아 올랐기 때문이다. 초록은 식물을 발아시키고 생장시키는 신성한 힘을 암시하는 생명의 색이며 청춘으로의 성장을 나타낸다. 

 '푸르름'은 완전한 초록으로 가는 전前단계에 있다. 불성의 껍질로 있던 자아가 완전하게 숙성함으로써 스스로 껍질을 벗을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무아의식의 출현을 위해 자아의 자발적 희생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즉 세속적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의 변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只此更無回避處  더 이상 피할 곳 없나니

 

정신은 목적성이다. 정신은 혼돈의 상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십우도의 저자는 그것을 더 이상 자아가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자아의 희생은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그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森森頭角畵難成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위풍당당한 쇠뿔만 보아서도 소가 가지고 있는 파워와 위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뚝 솟아 있는 쇠뿔은 깊은 연륜을 담고 있지만, 의식세계의 언어로서는 다 담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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