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를 잡는 일(得牛)은 중심에 대한 온전한 집중이다
네 번째 그림에는 목동이 도망가려는 소의 고삐를 힘주어서 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소는 들소다. 그것도 힘이 가장 세다는 황소다. 그야말로 영웅의 괴력이 아니고서는 소를 잡을 수 없다. 소를 잡는다는 것은 황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십우도에서는 이 목우의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길들이지 않는 소는 들소일 뿐 사람의 소가 아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소는 언제든지 자기 본연의 세계로 도망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금술에서도 변환의 물질은 가장 잘 달아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 물질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밀봉해야만 했다. 변환의 물질은 집중이 조금만 흐려져도 빠져나가버려 작업자를 불행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것은 정신이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을 말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소의 고삐를 단단히 잡는다는 것 또한 연금술의 이와 같은 작업과 다르지 않다. 달아나는 성향을 가진 변환의 물질은 결국 십우도의 소의 성향에 유비될 수 있는 것이다. 야생에서 자란 소는 끊임없이 본래적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소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이것을 심리적으로 말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료하게 깨어있지 못하는 한, 본성의 동물성은 언제나 현실화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만 리비도와의 충돌과 갈등, 오류를 해결할 수 있다. 황소로 나타나는 리비도는 억압된 상태로 있는 동물적 충동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충동은 단순히 성적 요구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융은 말한다. 육체적 충동이나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충동조차도 그 본질은 정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예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형상을 한 상징들은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발현發現들과 관계된다.
본능은 생명의 원리, 즉 생명의 법칙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생명은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정신적 생명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신의 관념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힘이기도 하다. 욥의 찬가에서 다시금 그러한 신의 관념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는 근원적 힘, 절대성, 냉엄함, 부당함, 또한 초인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의 힘과 운명의 힘이 지닌 순수하고 정확한 속성이다.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며 '가엾은 자를 죄짓게'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항해서 싸워도 결국은 소용이 없다. 인간은 이러한 의지와 어떻게든지 조화를 이루는 수밖에 없다. 리비도와의 협상은 결코 단순한 밀어붙이기가 아니다. 심리적 힘은 하나의 단일한 방향을 갖고 있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심지어는 상반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대로 흘러가게 둔다면 곧바로 치료 불가능한 혼란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기본 흐름을 감지하고 그로써 또한 고유한 방향을 감지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대개는 힘든 일이다. 그런 일에서는 모든 경우에 충돌과 갈등,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상징과 리비도>
결국 근원적인 힘은 리비도다. 리비도는 의식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이 원하는 것만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입장에서 리비도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냉정하고 엄격하며 때때로는 지극히 부당하기까지 한 것이다. 즉 리비도는 의식적 인간을 초월하여 있는 본능의 힘이다.
이 본능의 힘은 인간의 의식적 힘 밖에 있다. 그것의 속성은 정확하고 순수하다.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운명과 대결하여 싸울 수 없다. 운명에 순응하여 그것을 수용할 때 운명이 지닌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적 인간이 리비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여 그것과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서 의식적 인간은 파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능은 억압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의식의 힘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비도의 압도적인 힘은 자아의식으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게 만든다. 인간이 공포와 분노의 신을 상상하는 것도 리비도의 위협적인 힘 때문이다. 그 공포가 인간을 신의 자비에 호소하게 만든다.
제4 송 : 득우得牛
竭盡精神獲得渠 (갈진정신획득 거)
心强力壯卒難除 (심강력장졸난제)
有時纔到高原上 (유시재도고원상)
又入煙雲深處居 (우입연운심처거)
온 정신 다하여 이놈을 잡았으나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 위에 올랐다가도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는구나.
<십우도>
소를 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표현하고 있다. 소는 곧 마음임이 드러난다. 소로 상징화되는 마음은 그 힘이 너무 강해서 도무지 잡고 있기도 힘들고, 더구나 그것을 다스리기는 더더욱 어렵다. 소의 고삐를 잡고 조금 앞으로 나아갔는가 싶었더니, 어느 순간 소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구름 속에 들어가 버리려 한다.
연금술 작업도 소의 고삐를 잡고 놓지 말아야 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다.
"그 안에 있는 것이 도망칠 수 없도록 너의 문을 단단히 잘 닫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 신의 뜻에 따라 - 그렇게 해서 너의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자연은 점차로 자신의 조작을 완성해 간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소의 고삐를 단단히 잡듯이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야 한다는 것이 연금술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우도의 신화와 연금술의 작업(opus)이 시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공상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융은 그것들을 '자연에 적합하게' 적극적으로 불러내는 상상이라고 말한다.
즉 독자적인 사고, 혹은 표상작용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의식으로 들어온 무의식의 내용들인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