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4. 19:42

5. 목우 : 목동이 되다

2) 두 번째로 자아가 희생된다

그런데 부처로의 완전한 분화를 위하여 두 번째 희생이 필요하다. 신화에서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 상징된다. 

 

 해마다 용에게 처녀를 바치는 것은 아마도 신화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인 희생의 경우를 나타내는 것 같다. 무서운 어머니의 화를 달래기 위해 사람들의 탐욕의 상징인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것보다 완화된 형태의 희생으로는 첫 아이와 여러 가지 소중한 가축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상적인 사례는 어머니를 위해서 자기 스스로 거세하는 행위이다 : 이것을 조금 완화시킨 형태가 할례다. 이 경우에는 상징적인 행위에 의해 이미 대체 제물에 필적하는 한 조각이 최소한 봉헌된다. 희생의 대상물들은 절실히 갈구되고 존중된 소유물을 나타내는데 그와 같은 희생들과 함께 이 충동적 갈구, 즉 리비도를 새로운 형태로 다시 얻을 수 있기 위해 방기放棄되는 것이다. 희생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제물을 요구하는 하데스와 화해한다. 옛날부터 행동으로 모든 악과 죽음을 극복하고 신적인 대표가 된 영웅은 저 후기의 제식들에서는 사제와 같은 자기 희생자가 되고 생명을 다시 생산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신적인 형상이 되고 그의 희생은 하나의 초세계적인 비의이다. 그 희생의 의미는 평범한 희생 제물의 가치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희생의 상징성의 이와 같은 심화는 퇴행적으로 인간 희생의 사상을 재수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희생의 사상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하고 총체적인 표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미트라스와 그의 황소의 관계는 이미 이러한 사상에 매우 근접해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신화에서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하는 사제는 제물을 바치는 자이면서 동시에 바쳐지는 제물 그 자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치는 희생의식은 곧 자기 해체를 상징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기희생이란 자아의 희생이다. 자아의 희생이 심리학에서는 자아의 초월이다. 

 자아의 초월에 의해서 의식의 중심은 자아에게서 무아에게로 이동된다. 절대적 객관성인 무아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본다. 그러므로 자아의 초월은 진정한 자기 해체다. 자기 해체는 자아로서는 자신의 죽음이자 희생이다. 자아에게 그것은 지옥의 징벌에 해당하는 고통이다. 

 연금술이나 신화에 나타나는 자기희생의 상징들이 동물의 껍질을 벗기는 풍습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자기희생의 가장 근본적인 본보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생명의 나무이자 순교의 나무••••••에 매달린다. 그리고 죽음의 대가로 창조를 얻는다. 그는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면서 원인 간(protanthropos : 원초적 인간 Urmensch)인 아담이 삶에서 죄지었던 것을 죽음으로 갚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행동으로 원죄로 더럽혀진 삶을 영적인 단계에서 새롭게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구구스틴은 이런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머니와의 신성혼(Hierosgamos)이라고 했다.  <인간과 문화>

 

 앞에서 나무는 생명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짊어진 나무 십자가는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근원적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근원적 어머니의 희생과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부활은 새로운 인격이 태어나는 창조의 세계다. 원죄는 무명이다. 의식이 무명과의 신성한 결혼을 함으로써 무명은 의식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의식의 강화과정에서 의식이 '근원적인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옳다. 의식이 건강한 성장을 이룰 때까지는 '근원적인 마음'은 인식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소를 찾아 목동이 되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경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개체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인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정신의 전체성이다. 의식의 발달과정에서 '근원적인 마음'에 포함되어 있던 환상•공상•고태적 사고형태•기본적인 본능과 같은 원시적 특성들은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전체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잃어버린 '근원적인 마음'을 찾아야만 한다. 원시적 성질은 정신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소를 발견하는 것은 정신의 전체성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근원적인 마음'에 포함된 원시적 성질들은 '진보된 의식'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의식적 정보나 학습이 없는 상태에서 억압되어 있던 원시적 에너지가 분출할 경우, 신경증의 형태로 발전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근원적인 마음'은 의식에 의해서 반드시 조명되어야만 온전한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상징>

 

 희생으로 인해 충만한 힘을 얻게 되고 신들의 힘에 다다른다. 희생에 의하여 세계가 생성되었듯이, 즉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유대를 버림으로써,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멸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상태가 생긴다. 인간의 현존 이후의 이러한 새로운 상태는 다시 또 하나의 희생, 즉 우주적 의미가 부여된 준마駿馬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도달한다. 희생된 준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브리하다란야카-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 도이센 Deussen이 주목했듯이, 준마의 희생은 '우주의 포기'를 의미한다. 준마가 희생될 때 세계는 희생되며 파괴된다. •••••• 준마는 인간에게 쓰도록 제공된 에너지의 값(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은 세계로 들어간 리비도를 나타낸다. 위에서 우리는 세계를 생산하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매여 있는 리비도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는 처음에 어머니에게 속했다가 그다음에 세계로 들어간 리비도를 재차 희생시킴으로써 세계가 지양된다. 그러므로 준마는 이 리비도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 근원적인 마음을 희생했다면 근원적인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자아의 희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자아에는 절대적 객관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희생되고 무아가 드러나면 근원적인 마음은 왜곡되거나 손상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자아의 희생, 자아의 초월은 자아의 구조가 완전하게 구축되었을 때 가능해진다. 자아의 구조가 부실하면 무의식의 힘에 의해서 무너져 내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의식의 성장과 역할, 그리고 그 기능은 정신의 전체성을 준비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융은 자아가 곧 자기(Self)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하나의 본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분화과정에서 전략적으로 분리되어 맡은 바의 역할로 기능했을 뿐이다. 스스로 소를 찾으러 갈 수 있는 자아는 그 자신의 희생을 이미 각오하고 있다. 성장을 위해서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다가 성장한 후에 다시 어머니를 찾으러 들어간 자아의식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그 자신을 스스로 죽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자아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의 사악한 소행을 인식하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겐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그림자(우리 본성의 어두운 면)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도덕적 정신적 감염이나 암시에도 면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입장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감염에 노출시키고 있다. •••••• 그것은 우리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상징>

 

 

한국 고전 동화 심청전

지금까지는 자아가 경전을 보고 부처가 되고자 애를 써왔다. 집중명상을 통해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팔정도를 닦으며 자아를 강화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지는 자아의 상대의식이다. 자아의식의 강화는 부처, 즉 정신의 밝은 측면만을 추구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아가 강화되고 자아의 구조가 탄탄해지면 부처의 반대쪽인 어두운 측면을 인식할 차례가 된다. 왜냐하면 밝은 쪽만 인식한다면 정신의 다른 쪽을 차지하는 어두운 쪽은 내버려 두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은 밝음과 어둠이라는 양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전체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과 같다. 소를 찾는 일은 자신의 전체성을 전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다. 

 자아가 강화되기 이전에는 자아가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지만, 이제 성숙해진 자아는 자신의 그림자를 직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두운 측면을 볼 수 있을 때 도덕적•정신적 문제에서 더 이상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다. 이 과정이 자아에게는 십자가의 고난에 비유될 만큼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 힘든 과정에서 자아의 희생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는 그림자 작업을 거부할 것이다. 

 무아로의 변환은 오직 자아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그러므로 소를 잡아 길들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잡아 자기 자신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희생과정을 통하여서만이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두려움을 벗어나는 일은 두려움을 느끼는 주체인 자아의 초월, 자아의 희생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아의 희생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것이다. 즉 동물적 충동성의 리비도가 영적 리비도의 형태로 변환되는 것이다. 희생의 상징성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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