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의식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시작된다
다섯 번째 그림에서 소는 온순해지고 목동은 소의 고삐를 잡고 걸어간다. 목동은 소를 먹여 키운다.
제 5 송 : 목우牧牛
鞭索時時不理身 (편삭 시시 불리신)
恐伊縱步入埃塵 (공이종보입애진)
相將牧得純和也 (상장목득순화야)
羈鎖無拘自蓫人 (기쇄무구자축인)
채찍과 고삐를 떼놓지 않음은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 봐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절로 사람 따르리.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무의식은 정신의 어머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인 의식에게 공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는 어머니를 먼저 정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는 스스로 신이 되어 영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상징>
본성이 야생동물로 표현되는 것은 본성 자체에 함유되어 있는 원시적 위험성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상징과 리비도>
원시적 위험성인 야생동물은 반드시 사람의 손에 길들여져야만 한다. 그것이 인간과 야생이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길들임이란 단순히 야생동물을 억압하는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야생동물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여 그 특성에 맞는 일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야생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없는 나약한 자아는 야생의 힘에 그대로 말려들어가 버린다. 그것은 정신적 퇴행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
이것은 의식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영웅은 그 자신이 뱀이며 그 자신을 희생시키는 자이며 희생되는 자다." <영웅과 어머니의 상징>
이 말을 불교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깨달음은 소가 그 자신이라는 것을 알며, 스스로 소를 길들이고, 스스로 길들여지는 자가 된다. 다시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깨달음이란 자기 내면의 동물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이해하여 의식화하는 것이다.
다만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적, 혹은 외적 필연성에서 내향화되면 퇴행하는 리비도가 반드시 부모상을 다시 살려내게 된다. 그래서 유아기의 관계를 재현하려고 하므로 근친상간적 모티브가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 되는 것이 성인의 리비도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공할 수 없다. 성인의 리비도는 이미 성욕에 부착되어 있어서 이차적인, 즉 재활성화된 부모와의 용납할 수 없는, 혹은 근친상간적, 성적 특성을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적 특징이 근친상간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데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피해야만 한다. 그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아들이자 연인이 죽거나, 근친상간에 대한 징벌로 그 자신의 거세를 하게 된다. 혹은 충동, 특히 성욕의 희생이 행하여진다. 그것은 근친상간을 하려는 성향의 예방, 혹은 속죄의 조처로서 행하여진다. 성욕은 가장 확실한 충동 중의 한 예이므로 가장 빨리 희생의 조치를 겪게 된다. 그것은 금욕으로써 이루어진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내향화는 본원회귀 과정의 입문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자아의식의 성숙을 위해 외적 방향으로 향해 있던 리비도가 내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리비도는 과거로 퇴행하여 유아기로 돌아간다. 유아기는 어머니와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과거로의 퇴행은 어머니와의 만남이 필연적이다.
본성 자체가 이중성이기 때문에 충동 또한 언제나 이중성이다. 충동을 정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육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개인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충동을 정신적인 것으로 끌고 가려면 거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성인의 리비도는 성욕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마음을 육체적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그것은 정신을 중앙으로 집중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된다.
"'거세'는 불가능한 것, 혹은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리비도의 희생을 의미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러므로 융은 무의식을 단순히 생물학적 가설로만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을 생물학인 것으로 단정 지었을 때 '본능'은 장애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즉 본능이 장애로 단정 될 때,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 그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가설은 에너지를 물질계 안으로만 끌고 가기 때문이다.
즉 동물적 본능세계와 육체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면 의식의 발전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티벳 사자의 서> 융의 서문.
십우도의 신화가 소를 찾아 길들이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로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애의 문제는 신격神格의 문제까지 관련이 있다. 사랑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충동이다. 성적 리비도가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내면으로 향하여 심리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신神이다. 심리학적으로 바라본 신은 매우 강력한 감정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관념 콤플렉스(Vorstellungskomplex)라는 것이다. <상징과 리비도>
소•태양•물과 같은 상징들은 모두 재탄생을 의미한다. 재탄생은 육체적 존재에서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중생이 부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한다. 즉 황소가 죽어야만 새 생명, 새 인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지 않고서 부활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재탄생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바로 황소다.
황소 희생의 주제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미트라 Mithra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트라는 태양과 빛, 약속의 신이다. 신화에서 태양은 최고의 의식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적 부흥은 강력한 통치를 원하는 정치세력에 의해서 일어난다. 종교가 정치 세력화되는 순간, 종교의 순수한 상징성은 권력을 위한 상징성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미트라의 상징성인 태양은 최고의 의식성이 아니라 왕정王政에 부합되는 최고의 권력으로 해석된다.
미트라가 상징하고 있는 전쟁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극을 표현하기 위한 정신적 문제다. 그러나 권력화 된 종교는 그것을 전쟁을 위한 이론으로 탈바꿈시킨다. 미트라교를 국교로 한 왕은 선이고 그들과 대적하는 나라들은 모두 악이다. 그것이 미트라교를 전쟁의 신으로 만들어버린 이유다.
미트라교 창조관을 보여주는 그림에는 미트라가 황소를 제물로 바친다. 젊고 강인한 힘을 가진 미트라가 황소의 등에 타서 소의 머리를 잡고 황소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황소를 타고 있는 미트라의 옆에는 하늘을 향해 횃불을 든 사람과 땅을 향해 횃불을 든 사람이 있다. 하늘을 향한 횃불은 일출을 의미하고 땅으로 향한 횃불은 일몰을 의미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상징이다.
그런데 미트라 자신은 가장 강력한 빛을 발하는 정오의 태양이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일출, 즉 떠오르는 태양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빛으로서 자아의식이다. 반면에 일몰은 어두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빛으로서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정오의 태양은 최고의 인식을 의미하는 무아의 절대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십우도 신화에서도 깨달음의 정점에서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희생 제의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이것 또한 융 심리학과 십우도 신화가 의미하고 있는 순환에 유비될 수 있을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론에서는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과 악의 신 아흐리만은 태초부터 대극으로 있다. 창조주 아후라 마즈다는 일곱 단계에 걸쳐 세상을 창조한다. 제일 먼저 하늘을 시작으로 물•땅•식물을 만든 다음 다섯 번째 단계에서 동물의 조상인 황소가 창조된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창조물이 바로 최초의 인간 키유마르스Kiumars다. <페르시아의 종교>
그러므로 임신한 동물과 식물들을 살리기 위해 황소를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황소를 죽이는 임무를 태양과 광명의 신인 미트라가 맡았던 것이다. 즉 황소가 암흑의 신인 아흐리만에 의해서 병들었다는 것은 어둠이라는 병을 얻었다는 것이다. 어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광명뿐이다. 그러므로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것은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황소를 죽이는 것은 황소를 잡아 길들이는 십우도의 신화를 상기시킨다. 황소는 여성성•모성, 즉 근원적 정신으로서 무의식으로 보인다. 황소의 희생은 의식의 성장을 위한 무의식의 희생이다. 선과 악의 중재자였던 미트라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재자다.
미트라는 중재자 혹은 메시아의 이름을 갖는다. 왜냐하면 창조는 미트라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종교>
황소를 희생시키는 미트라스식 희생 제의는 태양의 순환과 관계되어 있다. 태양은 정신의 생명력이자 육체적 생명력인 리비도다. 그러므로 태양은 정신의 생명력으로서 태양의 속성을 지닌 영웅의 형상으로 인격화되지만 동시에 남근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준마는 인간에게 쓰도록 제공된 에너지의 값(價)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말은 세계로 들어간 리비도를 나타낸다. 위에서 우리는 세계를 생산하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매여 있는 리비도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여기서는 처음에 어머니에게 속했다가 그다음에 세계로 들어간 리비도를 재차 희생시킴으로써 세계가 지양된다. 그러므로 준마는 이 리비도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동물 희생의 상징은 본능적인 리비도로서 동물적인 성질의 희생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여기서 준마는 소와 같다. 동물은 신 자신을 대변한다. 부처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지만 자아의식의 성장을 위해 부처를 구성하고 있는 동물적 성질, 즉 본능적 리비도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희생이다. 자아 역시 근원에 의해서 태어나 의식을 성장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통합, 한마음(一心)이 되기 위해서 자아의 희생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희생은 자아의 희생이다. 부처라는 한마음은 자아의 희생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충동, 특히 성욕의 희생이 행하여진다. •••••• 성욕은 가장 확실한 충동 중의 한 예이므로 가장 빨리 희생조치를 겪게 된다. 그것은 금욕으로써 이루어진다. 영웅들은 대개 방랑자들이다. 방랑은 그리움을 나타내는 상像이다. 어떤 곳에서도 그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여 방랑하는 끊임없는 요구를 나타내는 심상이며, 잃어버린 모성을 찾고 있는 상像이다. 어떤 곳에서도 그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여 방랑하는 끊임없는 요구를 나타내는 심상이며, 잃어버린 모성을 찾고 있는 상像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양과의 비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영웅들은 항상 태양과 비슷하다. •••••• 그런데 영웅은 우선 무의식을 찾아 헤매는 그리움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빛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그리고 충족될 수 없는 열망을 가진 무의식의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빛은 자기 자신의 빛에 의해 유혹받고, 뿌리를 잃은 도깨비불이 되기도 한다. 항상 위험 속에 있으므로, 영웅은 자연의 치유적인 힘, 존재의 깊은 원천, 그리고 셀 수 없는 많은 형상들의 의식 없는 유대를 그리워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자아의식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만이 영웅이 될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의식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감각적인 충동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충동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높은 수준의 의식에서는 감각적 충동이 주는 만족으로는 삶의 무상이 결코 채워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완전한 자신에 대해서 극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완전함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