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4. 21:57

6. 기우귀가 :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1) 객관적 정신의 기초를 마련하다

십우도에서 소를 찾아 나선다.

소와 말은 신화와 민담에 널리 등장하는 원형으로서 우주를 상징한다.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소와 말은 충동, 근원적 삶이자 전 세계를 포괄하는 어머니와 동격이며, 세계의 혼으로서 영혼의 인도자이기도 하다. 

 황소가 우주의 소로 상징되는 것은 정신의 모든 풍요로움이 바로 거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황소는 본능을 나타내는 동물이며, 욕정적인 힘을 나타내는 생산성을 상징하는 리비도다. 리비도는 생명의 원리이면서 생명의 법칙이다. 그런데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는 황소를 제압해야만 한다. 황소를 제압하기 위해 황소에 올라타 황소를 희생시켜야 한다. 황소는 희생의 상이다. 

 

 황소의 희생은 원시적인 형태로 고착되어 있던 리비도의 변환을 의미한다. 원시적인 형태에 고착되어 있는 리비도는 성애적 문제와 같은 좁은 영역에 갇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변환은 충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충동으로부터 해방된 리비도는 더 넓은 세계를 향해 흐르게 된다. 

 

 원시적 충동들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성적 충동은 매우 강한 충동 중의 하나다. 리비도가 원시적인 형태로 고착되어 있는 한 리비도는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하다. 그것을 깊이 있게 성찰해야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리비도의 변환은 아주 중요하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황소는 생명을 부여하는 욕정적인 힘의 상징인 거인이자 위험한 짐승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도덕적 계율과 금지의 세계를 대표하는 정신(Geist)의 대표자로서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로서의 황소는 본능의 충동성을 저지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생명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잡아먹듯이, 아버지 역시 충동성을 위해 사는 것 같지만 동시에 충동성을 방해하는 계율이기도 하다. 

 

 이러한 황소의 상징은 정신의 모순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즉 정신은 균형의 상실이 일어날 때 역동성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소는 정신의 내적 객관성이면서 동시에 주관성인 심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융은 황소를 죽이는 의식이 명백히 동물적 충동성을 극복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계율의 힘을 정복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리비도가 동물적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억압되어 있는 충동성을 의미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경남 청도 운문사의 십우도 벽화

 

 즉 다시 말하자면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동물적 충동성에 대한 극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충동성을 억압하고 있었던 계율에 대한 극복이기도 하다. 동물성을 억압했던 것은 나약한 의식이 동물적 에너지에 의해서 압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십우도의 영웅은 동물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만큼 의식의 에너지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에서 황소는 신성한 생명을 부여하는 자다. 신성한 생명으로의 재탄생은 죽음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화의 영웅은 황소를 찔러 죽이려고 황소의 등에 올라탄다. 즉 더 이상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도 본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처럼, 십우도에서는 소를 찾고 길들여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표현된다. 신화의 영웅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듯이 황소를 짊어진다. 그 고난의 길에서 황소가 희생된다. 

 

 이와 같이 십자가와 영웅이 끌고 가는 무거운 짐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융은 해석한다. 즉 자기(Self), 부처라고 불리는 정신의 전체성은 동물의 본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경험적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초월했을 때 신神적인 것에 이르는 존재의 충만함을 신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의 엄청난 모순과 역설을 의미한다. 

 

 정신은 동물의 성실과 신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고, 극명하게 다른 이 두 성질의 통합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한마음(一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소는 본능의 충동력이다. 그런데 그 충동력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우주라는 어머니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작은 우주다. 그러므로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근원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로 상징되는 자아다. 소를 찾아 고삐를 잡고 길들이면 자아인 소는 더 이상 방종할 수 없다. 이제 자아는 주인 없는 들소가 아니다. 소는 자기의 중심에 주인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주인에 의해 길들여지고 주인을 위해 일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처럼 전체성을 위해서 자아는 스스로 희생의 길로 들어선다. 

 "이 무의식성은 희생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머리, 즉 의식적인 인식에로의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인간과 문화>

 

자아의 희생에 의해서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이란 무의식의 성질들을 활성화한다. 태초에 무의식은 한 덩어리로 있었다. 그러나 덩어리로서는 인식에 의해서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한 덩어리였던 무의식은 사고•감각•직관•감정의 네 조각으로 쪼개진다. 

 

융은 자신을 먹고 자신을 토해내는 우로보로스의 상징을 통해서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즉 무의식의 혼돈의 덩어리(massa confusa)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의식에 인식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조각으로 나누어짐으로써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성찰되고 혼돈은 질서로 편입된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성격유형이다. 감각•직관•감정•사고의 네 부분에서 어느 한 면의 특성이 두드러질 때, 개체는 그것의 특성을 전적으로 실행하고 인식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인간과 문화>

 

 심리학적인 인식은 내면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내부적 내용을 외부로 투사하고, 투사된 것을 다시 내적으로 되돌림으로써 일어난다.  <인간과 문화>

 이것을 황벽의 말로 바꾸면, 마음은 자아가 움직이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것을 관조하는 무아의식이 작용한다. 즉 자아는 마음을 외부에 투사하고 그것에 따라 갈애•욕망•미움•원망•사랑의 감정이 일어난다. 자아의 이러한 움직임을 관조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본래 정신은 부족함이 없는 완성본이지만 진정한 심리학적 인식이 없다면 그것 자체는 혼돈일 뿐이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歸牛歸家)'은 혼돈이 질서로 바뀌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객관적 정신의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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