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정한 삶은 의식할 때라야 가능하다'
"삶을 그냥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할 때라야 진정한 삶이 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자아를 희생한다는 것은 자아가 더 이상 인식의 주체로서 있지 않다는 의미다.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자아의 개입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아가 초월되면 의식만이 남는다. 자아의 틀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의식한다.
자신에 대한 의식은 내면의 그림자를 구체화하는 일이다. 자아의식에 의해서 본능적인 욕망의 감정들이 열등한 성질로 분류되어 무의식 층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와의 만남은 무의식과의 화해이며 자기 자신과의 화해다. 또한 이것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관문이다.
그때 우리는 동물들에 의해 '물리게' 된다. 다시 말해 무의식의 동물적 충동에 노출되는데 그렇다고 그것과 동일시되지도 않으며, 또한 '거기에서 도망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으로부터의 도피는 이 변환 과정의 목적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앞의 경우를 보자면, 자기 관찰을 통해 의식에 편입해야 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자아의 초월로 무아의식이 출현하지만 그 자체로 무의식의 의식화는 아니다. 무아의식이 드러나야 하는 이유는 무의식을 의식화하기 위함이다. 즉 융이 말하는 변환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소를 찾으러 나선 그 과정이 엄숙하고 절제된 아폴로적 삶의 과정이었다면, 소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은 디오니소스적 삶의 과정으로 가기 위한 초입에 선 것이다.
즉 자아의식은 부분적인 삶으로 이끌지만 무아의식은 전체적 삶으로 이끈다. 그것은 자아와 무의식을 관조함으로써 정신의 본질과 삶의 이치를 보게 한다. 생명 덩어리에 불과한 무의식을 인간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오직 의식성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이 절대적 객관적 정신인 무아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이고, 깨달음 이후에 후득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융이 말하는 '자기 관찰'이란, 자아에 의한 관찰이 아니라 자기(Self)로서의 전체성에 입각한 통찰이다. 즉 자기 자신을 절대적 객관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융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복되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는 성경 외전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깨어 있을 때라야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의식과 무의식, 선과 악, 본능과 이성이라는 대극에 의해서 끊임없는 갈등을 하게 된다. 갈등을 인식할 때 통찰이 일어나고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의 일방성이 아니라 무의식과의 상호 교류다. 그러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은 바로 정신의 전체성을 의미한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자기 인식에 관해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진정한 통찰은 무아의식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초월적 기능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 기능은 무의식과의 건설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 기초가 마련된다. <원형과 무의식>
무의식과 화해하기 전의 자아는 무의식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의식이 무의식을 적대적으로 대하면 무의식 또한 위협적인 모습으로 의식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무의식과 화해한 의식에게 무의식 또한 부드럽게 나타난다.
융은 무의식을 "대응하는 자의 고유한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는 독자적인 대응"이라는 점에 그 중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그러므로 진정한 삶은 자아와 무의식을 의식할 때라야 가능하다.
3) 자신의 결함을 충분히 감내하다
제 6 송 : 기우귀가騎牛歸家
騎牛迤邐欲還家 (기우이리욕환가)
羌笛聲聲送晩霞 (강적성성송만 하여)
一拍一歌無限意 (일박일가무한의)
知音何必鼓唇牙 (지음 하필 고순아)
소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 저녁놀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곡조 아는 이(知音)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십우도>
집단 무의식은 본능의 특성과 일치하는 선천적 형식의 총합이다. 집단무의식을 자아의식의 관념적 시선으로 본다면 깊은 암흑 속에 파묻혀 있는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성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류가 지닌 가장 소중하고 신비스러운 보물(Mysterium)이다.
이 신비스러운 보물은 소가 있음을 알고, 소를 탐구하려고 스스로 암흑의 두려움을 용기 있게 걸어간 영웅만이 존재의 삶 안으로 가져올 수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를 왜 영웅이라고 부를까? 소를 찾기 위해 끝도 모를 들판을 헤매면서 결국은 소를 만나고, 그 고삐를 잡아 길들일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융이 지적하는 아주 중요한 말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무의식을 의인화한 것이다.
무의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근원으로서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며,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서 감지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어머니는 원형의 이마고 Imago가 정신적 상像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키워낸다는 의미에서 어머니와 황소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것에는 정신의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상징적으로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것, 혹은 소를 찾아 나서거나 탐구한다는 것은 곧 무의식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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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의 영웅은 자기희생으로서 근원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근원적 세계란 모든 상들이 발생되는 곳이다. 그곳에는 불성이 분화되지 않은 채 '신적神的인 아이(göttliches Kind)'로 잠들어 있다. 잠들었던 '신적인 아이'는 소를 찾고, 길들이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영웅의 완전한 자기희생에 의해 깨어난다. 동물은 신 자신을 대변한다. 신의 동물적 영역이 희생됨으로써 정신의 배아로 있던 불성이 깨어날 수 있다. 융이 무의식의 어둠에 숨겨진 '빛나는 진주'로 표현했던 것이 바로 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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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열망하는 깨달음이나 구원은 자기 내면의 모든 결함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융은 정신이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깨달음 혹은 성불을 자아의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그러한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는 정면으로 대치對峙된다.
삶이 그 완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 속의 가시'(신약성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 ), 즉 결함을 감내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떠한 진전도 비약도 있을 수 없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보통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한 인간'• '종교적 인간' • '진짜 신사' • '지조 있는 사람' 등과 같은 인간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융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과는 정반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개성이란 훈련되고 조작된 어떤 것이 아니라 타고난 고유성이다. 고유성은 오직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그러므로 의식적 인격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환영 체험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무의식을 대하는 의식적 인격의 적절한 태도만이 자기 운명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의식적 인격의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의 독자적인 움직임이 바로 정신적 해리현상이다.
무의식의 환영들은 의식적인 힘으로는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에 내재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열망과 충동들이 만들어내는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환영으로 체험되거나 혹은 불안증상 등으로 분출된다. 왜냐하면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무의식의 내용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것들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내용을 인식하고 수용하여 의식에 동화시킬 때 위험하게 분열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은 인격의 분열이다. 분열로 인해 전체정신으로부터 의식이 고립되면 정신병의 시작점인 공황장애를 불러일으킨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소로 상징되는 무의식의 영역은 미분화된 정신의 열등한 성질들이다. 그것은 오직 자기 내면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화했을 때 정신적 온전함을 갖출 수 있다. 깨달음의 핵심은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자아의식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자연의 마음이다. 즉 자아에 의해서 조작되고 꾸며진 마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무아의식에 의해서 관조된다.
무아의식은 개인의 문제를 더 이상 자아의 판타지로 덮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 이것은 부분정신이 전체정신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개인의 문제에는 무의식의 요구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개인적 문제는 무의식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중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것을 자아가 방해한다면 그 사람의 인격은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아의식으로는 오직 평면적인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평면적인 모습으로는 실재를 알 수 없다. 개인적 문제가 개성화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 무의식의 요구가 충분히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격은 입체적인 실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불교의 후득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