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0. 18:22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1) 소는 본능적 인격을 상징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정신이 심(尋, vitakka)과 희론(戱論, prapanca)이 서로 도와 확장시켜 나가는 순환적 구조를 가졌다고 보았다.   <불교의 언어관>

 

 심은 탐구하는 것이고, 희론은 대상을 분별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지적활동이다. 십우도十牛圖의 또 다른 이름이 심우도尋牛圖다. 그러므로 심우도의 뜻은 소를 탐구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찾는 것 혹은 탐구하는 것이 바로 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는 상징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나를 찾고 탐구하는 것이 소로 상징되었을까? 소를 찾으려면 소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소를 찾는다고 했을 때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소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도를 깨닫는다 혹은 도를 찾는다고 하지 않고, 하필이면 소를 찾는다고 했을까? 

 

 소를 찾는다고 하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중국 선종禪宗의 제8대 조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남전보원南泉普願이다. 그는 열심히 경전을 읽고 탐구하여 삼론三論에 정통했다. 하지만 남전은 '나(我)'는 경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마조의 제자가 되어 무심선無心禪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무심선이란 자아의식에 대한 인위적 관조가 아니라 무아의식에 의한 관조다. 남전보원의 제자가 바로 조사선의 한 획을 그은 조주趙州선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전보원이 주장한 수행법이 바로 이류중행異流中行이다. 이류는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용을 지키는 올바른 행실行實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전은 스스로 그 자신을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라고 불렀다. 풀어서 말하면 '남전은 살쾡이 같은 녀석'이다. 

 

 물론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에 대한 전해오는 해석은 '남전은새끼 고양이(또는 살쾡이의 목을)를 베다'로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남전은 자기 내면에 있는 동물적 본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화해내는 데 일생을 보낸 사람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일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어느 날 남전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는 곳에 물소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것을 본 조주는 물소에게 꼴을 가져주었다. 즉 조주는 정신의 주인은 부처이지만, 부처는 원시적 동물성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스승의 진심을 간파했던 것이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은 부처만을 찾지만, 의식의 가장 높은 단계인 무아의식은 동물성을 의식화함으로써 같이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 

 

 동물성은 다름 아닌 남전 자신이다. 그러므로 조주는 물소에게 맞는 꼴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남전이 살쾡이의 성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남전참묘아는 '고양이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살쾡이 같은 녀석'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남전참묘도(南泉斬猫圖)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는 심우도에서 왜 소를 찾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좋은 모티브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 내면의 동물적 성질, 혹은 원시성을 찾아내는 일이 깨달음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동물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깨달음이란 마음이 분리되어 있음을 깨우치는 일이고, 성불은 분리된 정신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전체정신으로의 통합을 실천하는 진정한 심리학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정신의 통합을 말하고, 불교는 한마음(一心)으로의 회귀를 말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정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융이 말하는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이고, 불교가 말하는 정신은 중생과 부처다. 

 

 의식과 무의식이 본래 하나였듯이 중생과 부처도 본래 하나다. 의식의 성장과정에서 하나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리된다. 마찬가지로 중생은 무명에 의해서 부처와 분리된다. 그러나 무의식과 부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성장하도록 잠시 유보된 상태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적 인격에 의해서 의식 주도의 일방성이 정신을 지배하려고 하면, 무의식적 인격 혹은 '본능적 인격'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활동을 감행한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무의식적 인격은 의식적이고 지적인 훈련이 가해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인격이다. 그러므로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강박증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고 융은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적 인격만을 인정하는 사람은 본능적 인격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인격을 무시하면 무의식의 충동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억압된 무의식적 인격은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의식적 인격을 압도해버린다. 이것이 강박관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의 일방성에 대한 무의식의 보상적, 보완적 작용인 것이다. 

 

 의식은 교육할 수 있는 성질이지만 무의식은 교육에 의해서 훈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인격을 외면하는 한 그것의 위험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억압이나 억제에 의해서 훼손당했던 본능적 인격을 재건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즉 의식에 의해서 부정되고 무시되었던 본능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성질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을 융은 '본능적 인격복구'라고 말한다. 이러한 본능적 인격을 복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태도다. 의식이 대극적 성질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관점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었을 때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의식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상징인 '소'는 무의식의 인격, 즉 본능적 인격을 상징한다. 즉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본능적 인격을 복구하는 일이다. 남전이 스스로 '살쾡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 남전 자신의 본능적 인격을 복구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옛 철학자들은 원초적 인간을 나타내는 상징성으로 소•독수리•사자•천사를 생각했다. 이것은 소가 근원적으로 원초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원초적 인간은 세계 창조의 신과 결합하고 있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즉 소는 원초적 인간인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불성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무의식과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원초적 인간과의 만남이며 그것과 화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를 찾아 나서는 일은 정신(Geist)이 일정한 목적 지향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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