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0. 19:18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2) 소는 무명이다

소는 내적 세계의 원시성으로서 동물적인 충동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즉 의식에 의해서 길들여진 적이 없는 야만적인 무절제와 잔인한 탐욕을 담고 있는 위험한 리비도인 셈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페르시아의 신 미트라 Mithra가 황소를 제물로 희생시키는 장면이 있다. 투우의 기원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황소는 미트라의 내면에 있는 동물적 본성이다. 그러므로 황소를 희생시키는 의식儀式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동물적 본성에 대한 극복이며, 영혼의 승리를 의미한다. 원시적 동물성의 극복에 대한 의지는 인간적 성숙함과 영적인 평화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은 사람이 성인이 되기 위한 작업을 정신의 원시성을 길들이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동물적 원시성은 본능이다. 본능은 생명의 원리이고 생명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소로 상징되는 본능은 정신의 모상母床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융이 짐승의 상징성이 무의식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융의 이와 같은 주장은 불교의 이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융이 말하는 정신의 원시성이 바로 불교에서는 무명이다. 그런데 임제는 이 무명을 아버지(無明是父)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을 소로 상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기 안의 무명으로 있는 정신의 근원을 밝히는 일이 곧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원효 또한 무명의 충동력을 거론하고 있다. 이 무명의 충동력을 알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소를 찾으러 가는 이유는 여기서 밝혀진다. 

 

 우리의 경우를 보면, 비록 의식이 재생 의식의 태곳적 표상과는 엄청나게 동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무의식은 꿈을 통해 그러한 표상을 다시금 의식에 근접시키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의식의 자율성과 자족성은 의식 자체가 생겨나는 데 불가피한 특성이다. 하지만, 또 한편 무의식이 분리됨으로써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본능의 소외를 만들어내며 고립과 황폐화의 위험을 일으킨다. 

 본능 상실 상태는 바로 끝없는 불화와 혼란의 원천이 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이것은 우리가 왜 본능과 재결합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밝혀준다. 현재의식에게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태곳적 표상들은 결국 정신의 뿌리로 존재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정신 또한 그 근원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두려워하여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 뿐이다. 

 

 자아의식이 자신의 뿌리를 거부할수록 무의식은 꿈을 통해서 태곳적 표상들을 인식시키고자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자아의식의 일방성은 정신의 황폐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성만을 중시하게 될 때 감성은 차단된다. 왜냐하면 인간 감성의 뿌리가 바로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 일방적 정신은 무의식 정신과 대립되어 있다. 대립은 긴장이다. 불필요한 긴장은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불화를 만들고 정신을 혼란 상태로 이끈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다. 삼계를 분별하는 것은 무명인 자아의식이라고 원효는 말한다. 

불교의 보살

 대력보살이 말하였다. 
 "마음이 만일 맑은 데 있으면 모든 경계가 일어나지 아니하니, 이 마음이 맑을 때 삼계가 없어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왜 그런가? 보는 바 모든 경계는 오직 보는 바의 마음일 뿐이니, 마음의 환화幻化하지 않는다면 보는 바가 없게 된다. 보살아, 안으로는 중생이 없고 삼성三性이 공적해지면, 자기의 중생됨도 없어지고 남의 중생됨도 없어진다. 

 그리고 두 가지 들어감(二入)도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이 이와 같은 이익을 얻으면, 곧 삼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금강삼매경론>

 

 원효는 삼계를 마음의 세계로 보았다. 삼계는 무명의 세계, 즉 무의식의 세계다. 자아의 뿌리는 무의식이다. 분별은 의식이다. 참다운 의식은 자아라는 무명에 의해서 가려진 부분의식이 아니라 자아가 초월되어 있는 전체의식을 나타내는 무아다. 무의식과 대립되어 있는 자아의식으로는 내면의 원시성을 정직하게 인식할 수 없다. 

 

 삼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내면의 원시성을 인식했을 때 가능해진다. 가장 또렷한 인식에 의해서만이 분리된 정신은 한마음으로 통합하게 한다. 

낙샤트라-우타라바드라파다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며, 아직 형태가 없는 '생명 덩어리'는 파충류와의 마술적 접촉을 통해 '신성화된' 인간의 머리로 변한다는 것이다. 동물 같은 생명 덩어리는 의식과 합일되어야 본래적 무의식의 전체성을 대표할 것이다. •••••• 신을 표현하는 치유의 뱀.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여기서 '신성화된' 혹은 '조명된'이라는 표현은 바로 동물적 성질의 의식화다. 즉 본성의 동물적 성질은 의식화했을 때 그것의 본질적 형태가 변한다. 즉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동물성을 인식하여 그것을 의식화할 수 없는 상태로 있는 한, 본성은 그대로 동물성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왜 소를 찾아내고, 소를 길들이고, 소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즉 소가 바로 부처라고 말하고 있다. 불성은 소와 같은 생명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것이 무아의식의 빛을 통해서 정신의 전체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배사拜蛇교가 왜 그리스도를 뱀이라고 숭배했는지, '쿤달리니 Kundalini 요가'가 왜 '잠자는 뱀'을 깨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소는 열등한 인간성의 심적 부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등한 심적 부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저속하고 가치 없이 보이는 그 안에 바로 존귀한 신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를 찾는 사람은 분화된 정신기능의 상징이고, 소는 분화되지 못한 채 열등기능으로 남아 있는 정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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