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2. 11:14

깨달음의 상징이 왜 소였을까?

3) 소는 충동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무명의 충동성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충동은 육체적 충동과 정신적 충동이다. 즉 하나는 생리적 역동성으로 체험되고, 또 하나는 누미노제(신성한 힘)의 작용을 전개한다. 이 두 가지는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대립적 방향이지만 그 근원은 하나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충동이 정신적 충동으로 바뀔 수 있고, 정신적 충동이 육체적 충동으로 바뀔 수 있는 이유다. 융은 이것이 종교적 현상학에서 증명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황소는 생명의 에너지이며 동시에 성性에너지의 상징이다. 즉 황소로 상징되는 리비도는 성애적性愛的 문제가 되거나 종교적 찬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리비도가 본능 그 자체적 에너지로 드러난다면, 평범한 성애적 문제가 되거나 행복에 대한 집착 혹은 그것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된다. 

 

 그러나 리비도가 내향화를 통해 환기되면, 그것은 종교적 '창조'로 변환이 가능해진다고 융은 밝히고 있다.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집착은 그것이 어느 쪽이든 본능적 에너지에 구속되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방향이든 무의식적 상황에 있는 한, 근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에 대한 이해가 없는 모든 행위들은 자기 속임수일 뿐이다. 

 

 리비도는 본능적인 충동력이다. 그러므로 융은 그 어느 쪽이든 단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 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적 변화나 전환은 그러한 충동력에 의해서 일어나지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너무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이 본능적 충동을 억압할 때 자신의 의지로 한 억압행위를 스스로에게 숨길 수 있다. 이것은 억압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신앙심이 깊은 한 여인을 예로 들고 있다. 그녀는 멋진 남자를 보게 되고, 성애적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불가능하거나 부도덕하다고 규정지음으로써 그녀의 충동은 억압된다. 억압된 성애적 리비도는 자신의 신앙심에 의해서 쉽게 종교적인 승화로 변환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는 정상적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억압은 리비도를 퇴행적으로 환기시키는 문제를 가진다. 즉 억압된 리비도가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면 외부의 대상을 찾아 투사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부처나 신 혹은 사랑하는 대상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외부에서 찾을 때 대상에게 구속된다. 

 

 마찬가지로 신을 자신의 밖에서 찾을 때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나 형상에 구속된다. 모든 구속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마음을 투사하는 동안은 내면적 갈등에 의해서 일어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투사가 실현되는 동안은 진정제를 놓은 것처럼 고통이 일시적으로 멈추지만 진짜 치료가 된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투사를 문제로 보는 이유다. 

 

 그것이 사람에게 투사되든지 신에게 투사되든지 간에 투사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밖으로 옮겨버리는 일이다. 해결은 문제의 본질로 들어갔을 때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문제를 외부적 대상에 투사한다는 일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진정한 깨달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상징과 리비도>

 

 억압은 자아의식이 만들어내는 의지적 행위이기 때문에 자아 콤플렉스에 의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자아의식의 제약은 의식이 무의식의 내용에 갈등을 보내는 것이다. 갈등은 무의식의 내용을 방해하거나 혹은 왜곡한다. 왜곡은 자연의 순수한 변환과정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십우도가 그 어떤 투사도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소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그만큼 기본적으로 의식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소가 깨달음의 상징이 된 것도 본성의 양면적 현상을 나타낸다. 생리와 정신은 대극을 이루지만 결국은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이 모두가 본성의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우도는 오직 자기 내면의 본능적 에너지를 찾아 직면하고 명료하게 인식하고 이해하여 승화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의식은 확장이 일어나고 궁극적 해방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융에게 직접적으로 정신분석을 받고 융의 심리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헤르만 헤세의 중요 작품들은 모두 충동의 양면성에 대한 정신적 현상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정신적 충동성이 모두 육체적 충동성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정신적 귀결로 완성되는 것이 헤세 작품의 특징이다. 
 <융의 개성화 과정에 대한 연구 - 헤세의 『데미안』,『황야의 늑대』,『싯다르타』를 중심으로>,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충동의 양면성에 대한 융의 이론이 헤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충동의 상이 일어나는 근원은 원형에 있다. 원형은 정신을 만들어내는 형태 혹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형을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원형이 아니라 원형의 작용이다. 정신은 원형에서 발생하는 충동의 두 방향이 대극을 이룸으로써 에너지가 풍부해진다. 

 

 다시 말해서 대극에 대한 인식작용이 활발해질수록 정신 에너지의 발생 또한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결국 대극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파악은 대극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의식성이 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가 중생인 자아의식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과 대상을 분별하는 자아의식이 없다면 부처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대극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무아無我'의 의미가 단순하게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아의식이 바로 대극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식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대극에 의해 가능하고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대극에 의한 인식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십우도에서 소와 사람은 대극이었지만 결국은 하나가 된다. 아니 그 하나조차도 없다. 그것은 정신의 중심이 자아의식에서 무아의식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을 자아의 제거라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자아는 존재를 존재로서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현존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대극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극은 존재의 본질인 셈이다. 

 

Alex Grey ( 1953~ ) 작품 &amp;#39;Cosmic Artist&amp;#39;Alex Grey (1953~ ) 작품 &amp;#39;Love is a Cosmic Force&amp;#39;

 원형은 충동의 형식원리이기 때문에 파란색 안에 붉은색을 품고 있다. 즉 보라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는 이 비유는 더 큰 파장 영역에 나타나는 잠재적( 즉 초월적) 원형으로부터 충동을 유도해 낼 수 있다. 그렇듯이 더 높은 주파수 영역에서의 충동의 본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형과 그의 대극 간의 내적 친화관계를 보여주는 예로 보라색의 이미지를 추천하고 싶다. 

 

 충동의 형식원리 자체가 대극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분리는 대극을 인식함으로써 일어난다. 분리는 정신의 전체성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순환이다. 순환은 시작점을 출발하여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처음 출발하던 그 시작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의식화에 의해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명 자체였던 처음의 근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여기서 언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폭발적으로 의식의 확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있다. 의식이 사고思考적 측면이라면 무의식은 본능적 측면이다. 이것은 서로 대극을 이룬다. 대극은 극명하게 다른 성질이지만 내적으로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인식의 최고점에 이르면 빨강과 파랑은 섞여 보라색이 된다. 연금술사들은 이것을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의 상징으로 표현했고, 십우도에서는 원( 혹은 공空)으로 표현했다. 

 원은 분리된 정신의 통합이다. 통합은 대극을 인식하던 자아의식이 초월됨으로써 일어난다. 공空은 인식의 주체가 비어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다. 

 

 즉 십우도는 정신이 의식 저편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본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인식하여 의식화함으로써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융은 보라색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 불국사 자하문
경주 불국사 자하문(紫霞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천왕문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불이문(해탈문)
경남 양산 통도사 천왕문과 불이문(해탈문)

 

이것은 사찰의 구조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찰의 일주문一株門이 바로 분리된 정신의 통합을 상징한다. 일주문은 일심一心이다. 일심은 자아의 초월이자 무아의식의 출현이다. 무아의식이 출현함으로써 정신의 원시성들인 중생들의 구제가 가능해진다. 중생 구제의 성공을 알리는 문이 천왕문天王門이다. 

 

 자아의식에 의해서 의식과 무의식은 대극으로 있었지만, 무아의식에 의해서 의식화가 일어난다.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 의해서 비로소 해탈문解脫門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양산 통도사에는 이 해탈문을 자하문이라고 써놓았다. '자하紫霞'는 자주 빛깔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뜻한다. 부처님 몸에서 자줏빛 금색 안개가 나왔다는 것이다. 자주색은 영어로 퍼플 purple이고, 퍼플은 동시에 보라색으로 번역된다. 자주색은 붉은색이 파란색보다 많은 것이고, 보라색은 붉은색보다 파란색이 더 많이 섞인 것이다. 

 

영화 아바타영화 아바타

 

 원형은 상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동인 것이다. 이것은 신성력神聖力, 즉 원형적인 상의 매혹스러운 힘 속에서 나타난다. 충동의 실현과 동화는 절대로 붉은색 쪽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충동의 영역으로서의 침강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상의 동화同化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상은 충동을 의미하는 동시에 충동을 환기시킨다. 물론 생물학적 수준에서 만나는 충동과는 다른 형태다.    <원형과 무의식>

 

 원형은 상이면서 동시에 역동이다. 개인이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정신적 소인은 원형에 있다. 충동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생물학적 수준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완전하게 자기화하였을 때이다. 즉 충동의 영역으로 침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의식화해 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충동의 의식화는 충동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자아의 초월인 무아의 절대의식에서만 가능하다. 무아의 절대의식이 기능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견성은 자아가 자신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아가 성품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아가 인식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초월이고, 자아의 초월에 의해서 충동의 상은 신성력神聖力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충동은 양면성이다. 그러므로 소는 생물학적인 충동과 정신적인 충동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낮은 의식 수준에서는 충동이 생물학적 형태 안에서 머물게 된다. 그것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로잡힘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충동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해야만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고 동화할 수 있다. 동화는 본성에 대한 이해로 발전한다. 견성이라고 말하는 신비현상 또한 이처럼 원형이 만들어내는 충동의 작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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