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는 원초적 심혼의 동물적 신성을 상징한다
십우도는 인간이 자신의 동물적 본능의 근저로 내려가는 일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십우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원형은 집단적 형식이고 상像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원초적 관념들의 근원지가 바로 원형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형은 어디서나 비슷한 관념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우도처럼 인간의 동물적 본능의 근저로 내려가는 상징적 신화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형은 선과 악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 대극이다. 결국은 인간이 선하고 악한 것도 모두 이 원형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무의식은 공포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본능적 인격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원형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를 찾으러 가는 일은 자기 안의 본능적 인격을 복원하는 일이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디오니소스적 비의秘儀라고 불렀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디오니소스의 사전적 의미는 술과 신으로서 황홀과 도취를 상징한다. 술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십우도에서는 찾을 수 있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은 승려가 손에 술병을 들고 저잣거리에 서 있다. 물론 이 그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후대의 화가들이 그림에서 술병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술병을 들고 있는 본래의 그림이 깨달음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술은 이성적 사고를 중지시킨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자아의식의 초월이자 무아의식의 출현이다. 즉 무아의식이 정신의 중심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의는 티베트 문화 영웅인 파드마 삼바바의 일화에서도 발견된다.
"그렇다. 고귀한 스승은 중독될 정도로 술을 마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마신 것은 신들의 음료이며, 생명의 영약이며, 불사의 감로였다. 그것을 실컷 들이킨 사람들은 깊이 중독되었고 그리하여 현상세계의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
파드마 삼바바의 그림이나 초상에는 신성한 음료가 담긴 두개골의 잔을 들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이성의 인식체계를 망각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체험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이성적 사고의 방해로 체험되지 않는 정신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불교가 자아의식의 초월을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자아의식의 초월은 정신의 자유를 의미한다. 자아의식에 의해서 소외된 본능적 인격은 자아의식을 초월함으로써 만날 수 있다.
본능적 인격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 즉 이성적 인격으로만 사는 정신은 전체적 정신에서 볼 때 심각한 불균형이다. 그러므로 본능적 인격을 경험한다는 것은 정신의 전체성에 다가서는 것이다. 자신의 근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 근원을 아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어두운 성질을 밖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을 의식화한다는 말이다. 자기 안의 원시적 성질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두 밖으로 투사한다.
세상에서 도덕군자만큼 비정한 사람도 없다. 그는 자기 안에 비도덕적 성질들을 모두 밖으로 투사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비정할 만큼 차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어리석음을 비난하지 않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본능적 인간을 복원하는 일은 정신의 근원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이자 이해다.
융은 디오니소스적 동기가 인간의 감정 상태나 정서와 관계한다고 본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즉 이성적 인간이 억압한 감정과 정서는 원초적 심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 비의秘儀는 원초적 심혼에 대한 경험을 의미한다. 전체정신은 이성이나 본능 어느 한쪽이 아니다. 정신은 이성이면서 동시에 본능이다.
즉 정신은 의식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전체성이 되기 위해서는 억압되고 소외된 본능의 인격을 복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혼의 동물성은 야수이면서 동시에 신성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인간적 특질이 원초적 심혼心魂의 동물적 신성 속에 열정적으로 잠겨들 때의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의미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융은 지성에 의존되어 있는 사람들은 심혼을 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심혼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성은 삶의 이치에 지극히 무심하지만 무의식의 카오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성에 의존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심혼은 잠시 의식의 뒤로 물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심혼은 지성을 사로잡아 버린다.
이것에 대한 것으로 융은 다음의 예시를 든다. 즉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개발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잊어버린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직무에 충실할 뿐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관념에서 바라보는 적敵은 악이고, 악을 소멸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사로잡는 심혼의 힘이 의식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그것은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인 전쟁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살인들이 자행된다. 수많은 신화의 주제가 전쟁으로 표현되고 있고, 인간의 역사가 전쟁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것도 원형에 있는 선과 악의 두 대극이 현실로 투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혜능은 선과 악이 원천적으로 정신의 성질로서 존재하지만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는 개인의 의식 수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의식의 수준이란 아이큐 지수가 아니다. 의식성은 깨어 있음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감성이다. 그 감성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심혼에 그 원천이 있다. 깨달음은 감성의 세포가 활짝 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능의 인격이 복원되는 것은 감성이 온전하게 살아나는 일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원형이 가지고 있는 대극의 특성이 자아의식에게는 혼돈의 삶을 일으킨다. 선과 밝음을 추구하는 의식이 무의식의 원시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으로 구분되는 원시성 역시 정신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일의 썩은 부분을 자르듯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의식의 조명을 받을 때 정신의 본래적 기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무의식성에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의식 수준의 높은 단계에서 선과 악의 공동 기능이 갖는 의미를 찾아낼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대극에 의해서 분명한 인식이 일어남으로써 의식화 과정을 밟게 된다. 의식화는 대극적 갈등을 끝내는 일이자 정신 통합의 길이다.
<원형과 무의식>
깨달음이란 자기 안에 있는 대극을 인식하는 일이다. 한마음은 대극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극을 아무런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정신적 기능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소는 자아의식의 입장에서 대극으로 바라보던 원초적 심혼에 대한 상징이다. 원초적 심혼은 동물의 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본질은 신성神聖이다. 이것이 바로 소를 찾아 길들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