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는 변환의 상징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대극으로 대치되어 있는 한 의식이 갖는 긴장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자아의식에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불안은 극대화된다. 불안에 몰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다. 온갖 중독 현상들은 불안한 자신을 잊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다. 조직적 종교 활동에 빠지는 일 또한 근원적으로 불안한 자신에 대한 보상이다.
너는 무의식에서 도망가기 위하여 종교와 더불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너는 종교를 너의 심혼의 일부에 대한 대치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는 삶, 즉 양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삶의 완성이며 절정이며 열매인 것이다.
<원형과 무의식>
신경증은 심혼의 삶을 알리는 무의식의 경고라고 융은 말한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무의식이 알리는 경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아가 불안한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진리를 도덕적 완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의 기준에서 무의식의 동물적 성질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선과 악이라는 양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심혼의 두 대극을 자기 안에서 포용할 수 있을 때 종교적 삶은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십우도에서 그리고 있는 공空의 만다라가 드러내는 자리다. 공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자아의식이 아니라 그 모두를 수용하는 무아의식이다. 무아의식이 인식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대극은 극복되고 분리되었던 정신은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자기 내면의 원시림 속으로 황소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황소로 상징되는 무의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종교에 의존하지도 않으며, 심혼적 삶의 대치물로 종교를 이용하지도 않는다. 소를 찾아 나선 자는 이미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종교는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로 일어나는 정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한마음(一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 소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자기 안에 무의식을 찾아 인식하고 길들이고 의식화함으로써 묵묵히 통합해 간다.
소를 찾아 나서기 이전에는 종교적으로 의존되어 있었다. 그것은 의식이 허용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의 요구들을 종교적 헌신을 통해 회피하거나 종교적 관념의 거룩하고 깨끗한 감정으로 대체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적 요구들을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그 감정들로 인해 현실적으로 만날지도 모를 곤란한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며, 삶의 완성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환은 바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 동물적이며 고태적인 유아성에서 신비적인 '최고의 인간(homo maximus)'으로 이어진다. 재생의식의 상징성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단순히 유아성과 고태적인 점을 넘어서 선천적이고 심리적인 소질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것은 동물적 차원까지 거슬러가는 조상의 모든 삶의 결과이며 침전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조상의 상징이며 동물의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과 생명의 진정한 원천인 무의식이 분리되는 것을 지양하고, 유전적이고 본능으로 구성된 자연적 토양과 개체의 재결합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변환은 동물적이며 고태적인 유아 수준에 머물던 의식성이 '최고의 인간(homo maximus)'으로 불리는 가장 높은 의식성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의 변환은 정신의 가장 낮은 곳, 즉 무의식으로 침잠했을 때에만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정신을 분리시키는 자아의식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아의 초월이 요구된다.
자아의 초월은 자아의 희생이다. 즉 자아가 죽어야만 무아의식이 태어난다. 재생의식은 동물적 차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선천적인 심리적 소질에 대한 자기 관조다. 그것은 의식과 생명의 원천인 무의식과 진정으로 하나 되는 일이다. 모든 개체는 자연 정신인 무의식과의 재결합을 통해서만이 온전한 정신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의식의 판타지는 깨달음을 찾아 가장 높은 곳을 지향志向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소를 찾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집단무의식으로 하강한다. 소는 지적이고 세련된 성인成人과 반대되는 동물적이며 고태적인 유아성이다.
그런데 진리의 가장 고귀한 진수는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투박하기 짝이 없는 그것에 있다. 그것이 황소를 깨달음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다. 황소는 열정, 욕정을 나타내며 수태를 의미하는 남근이다. 말하자면 생명 에너지로서 생산성을 상징한다.
<상징과 리비도> 『본래 인도 유럽 어족語族의 신이었다가 로마제국에 의해 널리 숭배된 미트라스 Mithras 제의에 등장하는 황소신은 '세계 축의 수호자' 혹은 천하무적의 태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태는 정신적 생명에너지로서의 잉태다.
자연의 모든 창조는 음과 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양의 측면인 의식과 음의 측면인 무의식으로 분리되어 있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것도 새롭게 태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에 의해서 새로운 인격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유이고 소를 찾아 나서는 이유다.
분리된 정신이 한마음으로 통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모두 정신적 성질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을 택하고 어느 한쪽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고, 정신도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황소는 의식 아래로 가장 깊이 숨겨진 무의식이며, 정신의 근원에 대한 상징이다. 황소로 의미되는 남근적 의미는 정신의 통합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정신의 재탄생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황소가 상징하는 리비도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리비도는 원형이다. 융은 세상에 표현되고 있는 수많은 신들의 모습 또한 리비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들은 다 정신의 내용물들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이라고 표현한다. '나'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자아의식의 좁은 관념으로는 제법을 포용할 수 없다. 자아가 초월되어야만 자기 내면의 황소를 만날 수 있다. 황소와 하나가 되었을 때 리비도의 특성에 대한 통찰이 일어난다. 그것을 통찰하는 과정을 열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 십우도다.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며 아직 형태가 없는 '생명 덩어리'는 파충류와의 마술적 접촉을 통해 '신성화된'(조명된) 인간의 머리로 변한다는 것이다. 동물 같은 생명 덩어리는 의식과의 합일되어야 하는 본래 무의식의 전체성을 대표할 것이다. 그것은 뱀으로 추측되는 파충류가 제식에 사용되면서 생겨난다.
뱀에 의한 변신과 신생의 관념은 잘 입증된 하나의 원형이다. 그것은 신을 표현하는 치유의 뱀이다. ⦁⦁⦁⦁⦁⦁ 배사 교도들에게 그리스도가 뱀이었다. 인격의 신생이란 관점에서 뱀의 상징성이 가장 뜻깊게 형상화된 것이 쿤달리니 요가에서 발견된다. ⦁⦁⦁⦁⦁⦁ '형태 없는 생명 덩어리'는 곧장 연금술적 '혼돈', 즉 창세 이래로 신성한 생명의 싹을 품고 있는 '덩어린'나 '무형의 재료', 혹은 '혼돈'을 연상시킨다.
미드라쉬Midrasch에 따르면 비슷한 방법으로 아담이 창조된다. 즉 신은 처음에 먼지를 모으고 다음에는 거기에서 형태 없는 덩어리를 만들어내며 그다음에는 팔다리를 창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신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순환적 발전', 즉 창조적 변환의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소는 무의식의 전체성을 대표하고, 사람은 의식을 대표한다. 의식화되지 않는 동물은 생명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은 의식과의 마술적 접촉을 통해 '신성화된 인간'의 머리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성화된 인간의 머리'는 자아의식의 머리가 아니라 무아의식의 머리임이 밝혀진다.
자아의 의식은 부분의식이지만 무아의 의식은 전체의식이다. 자아의식이 촛불이라면 무아의식은 태양이다. 태양이 그 어떤 것을 구분하여 비치지 않듯이 무아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의식이라고 말하고, 절대적 객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성으로 표현되는 것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그러므로 소를 만나고, 소를 길들이고, 소와 '나'가 하나가 되는 것도 모두 정신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소도 없고 나도 없다. 즉 공空이다. 공이란 비어 있음이다. 즉 '나'가 보고, '나'가 듣고, '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주체가 없다. 인식 그 자체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아는 그 어떤 관념의 틀도 갖지 않는 순수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는 최고의 인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무아는 단순히 '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무아는 곧 의식인 것이다. 무아의식의 출현은 변신을 위한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것은 자아의 인격에서 무아의 인격으로의 완전한 변환이자 뱀이 껍질을 벗는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탄생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자아가 정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아의식에게 주체를 내주는 일이다. 소로 표현되는 무의식적 인격에서 사람으로 표현되는 의식적 인격으로의 변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