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명대사의 의병과 고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4. 17. 13:40

사명대사의 의병과 고뇌

 승병장으로 떨쳤던 사명대사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전후에 활약한 위대한 승려이다. 그는 왜군과 싸우고 협상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수많은 포로를 데려온 명장이었다. 그는 노련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풍천 임 씨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호는 사명당(四溟堂), 선군(松雲), 종봉(鍾峰)이다.

 

 그는 밀양 출신으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이다. 그는 세속을 떠나 승려가 되었지만, 국난이 닥쳐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비참한 현실이 눈앞에 닥치자, 왕을 호국하라는 칙령과 스승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권유가 산에 이르자, 그는 즉시 승병을 이끌고 출가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평민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유정은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지킨 승려였기에 더욱 큰 괴로움과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살펴보겠다. 승병장으로서 전쟁 중 수많은 무공을 세웠고, 일본에 포로로 잡힌 동포들을 귀환시키기 위한 외교적 협상을 벌인 것은 당시 대신들과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한편, 그는 선과에 조기 급제하여 선불교의 본산인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되고,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불교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인재를 등용하고 나라를 지키는 데에도 탁월한 안목을 보이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창작된 작품들, 특히 시의 세계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노래하는 작품, 전쟁 참전의 현실과 승려의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승려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자세를 그린 작품,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는 선시가 있다. 한편, 그의 행적을 담은 <석장비명(石藏碑銘)>을 통해 우리는 그의 비범한 성품과 인간으로서의 너그럽고도 깊은 보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처절한 현실과 고뇌를 담은 그의 시 세계

시월 초사흘 눈이 내리는 날(十月初三日雨雪寫懷 시월초삼일우설사회)

天寒旣至白雪如斗(천한기지백설여두) 추운 절기 벌써 이르러 흰 눈이 함박처럼 내리네

赤頭綠衣兮絡縱橫(적두노의혜락역종횡) 적두 녹의 왜구들 활개치고 다니는 속에

魚肉我民兮相枕道路(어육아민혜상침도로) 어육된 우리 백성 도로에 나뒹구네

통곡혜통곡(痛哭兮痛哭) 통곡하고 통곡하나

일모혜산창창(日暮兮山蒼蒼) 해가 지고 산은 푸르다

요해혜하처(遼海兮何處) 아득한 바다는 어드매뇨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 임금님 바라보나니 하늘 한쪽이네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구는 마치 뜨거운 칼날이 대나무를 가르듯 전진하여 5월에는 서울을,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 작품은 혼돈 속 덧없고 비참한 죽음 앞에서 울고 또 울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변주서와 이별하며 (己亥秋奉別邊注書 기해추봉별변주서)

공승조명하원문(孔勝祖明夏院門) 조정의 명 공손히 받고 병영에 내려오

이하산하도차분(夷夏山河到此分)  여기 이르러 산하가 오랑캐와 우리로 갈라졌네 

사해풍진유전전(四海風塵猶轉戰)  사해풍진은 아직도 싸우고 있어서                                 

십년정수낙종군(十年征戍更從軍)  10년 수자리 다시금 종군에 나섰네 

성우악조간회조(城隅落照看廻鳥) 성 모퉁이 낙조에 돌아오는 새를 보고

천외귀심망거운(天外歸心望去雲) 하늘 밖 돌아갈 마음에 떠가는 구름 보네 

소진요분정하일(掃塵妖氛定何日)  어느 날에야 요망한 왜구들 쓸어버리고 

발회금압세향분(撥灰金鴨細香焚)  화로의 재 헤집으며 가는 향불 사를까                  

 

대사가 입대했던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산사에서 향을 피우며 조용히 수행하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승려의 한탄과 귀향의식, 그리고 악귀와 같은 악한 왜구를 쓸어버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조정의 명령으로 일본으로 떠나면서, 대사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비록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에 복무했고 외교 사절로서의 임무도 수행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가 항상 산사로 돌아가 수행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시 세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죽도에서 유생의 조롱에 답하며

(在竹島有一儒老譏山僧不得停息以拙謝之 재죽도유일유노기산승부득정식이졸사지)

西州受命任家裔(서주수명임가예) 서주 임 씨의 후예로 태어나 

庭戶堆零苟不容(정호퇴령구불용) 가문이 영락하여 몸 둘 곳 없었네 

無賴生成逃聖世(무뢰생성도성세) 의뢰하여 자랄 곳 없어 성세에서 도망하였고 

有懷愚拙臥雲松(유회우졸와운송) 어리석고 못난 생각에 구름 소나무에 누웠네 

山河去住七斤衲(산하거주칠근납) 산하에 멈추고 가는 것은 일곱 근 누더기요 

宇宙安危三尺筇(우주안위삼척공) 우주의 안위는 석 자의 지팡이라오 

是我空門本分事(시아공문본분사) 이것이 우리 공문의 본분의 일이거니 

有何魔障走西東(유하마장주서동) 무슨 마귀의 장애가 있어 동서로 내달리는지 

 

 이 시는 1604년(선조 37년)에 정부의 명령으로 쓰시마로 가던 중 죽도에 잠시 머물렀을 때의 심경을 담은 작품이다. 스님은 그곳에서 유생에게

 

 “스님은 스님답게 살아야 하는데, 왜 돌아다니느냐?”

 

 라는 조롱을 참아야 했다. 그는 유생의 편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마귀의 방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며 관대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전란 중에 승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정규군에 비해 수많은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고, 승려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여 꿋꿋이 싸웠다.

 전란 후에도 스님은 군 복무를 계속하며 성벽 축조와 방어 사업에 참여하여 승려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명승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세속 사회에서 오래 살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 세속적인 경향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이는 승려들의 세속화 현상의 징후였다. 당연히 불교계 안팎에서 스님에 대한 이러한 우려와 시기심이 만연했다.

 

임진왜란에서 호국 불교를 몸소 실천했던 사명대사 유정

 

<석장비명(石藏碑銘)>에 보이는 사명대사의 타고난 천품과 행적

대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지혜롭고 뛰어났다. 자라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에 놀러 가면 모래를 쌓아 탑을 쌓거나 돌을 세워 부처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꽃을 꺾어오고 밤을 주워 공양하기도 했다.

 

 

 

 (1) 어느 날 그물꾼이 큰 장어를 잡는 것을 보고 밤을 사서 연못에 놓아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감동하여 딴 밤을 대사에게 가져왔다. 대사는 아이들에게 밤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어른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보다 더 근본적이다.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은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을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뛰어넘는다.

 인간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기 때문에 인간의 편의를 위해 침략하고 죽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모기나 개미처럼 아무리 작은 생명체라도 생명이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마음의 토대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

 사명대사는 법을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남들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려 애썼다. 이는 그가 타고난 재능과 불성을 타고났다는 증거다. 이러한 본성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정진하여 수행하였기에 큰 스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 임진년 여름, 왜구가 유점사를 침략하였을 때, 큰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께서 본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는데, 왜구가 너무 사나워서 우리 백성을 해칠까 봐 걱정이다. 제가 가서 그 미친 도적떼를 달래어 악한 기운을 쓰지 말라고 일깨워 준다면,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중략)

당시 영동 아홉 고을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대부분 이 큰 스님의 공덕 덕분이었다.

(3) 선조가 서역으로 떠날 때, 그는 의리의 마음으로 왜구에 맞서며 여러 중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와서 여러 해 동안 먹고 쉬고 놀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시기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수백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각지에서 많은 의승들이 모여 승병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이때 서산대사는 조정으로부터 각 도의 승병들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사명대사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이렇게 대사는 승병들을 이끌고 감찰관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 장군과 연합하여 이듬해 정월 평양에서 적을 무찔렀고 행장을 격파했다. 그 후 대사는 총사령관 권율과 함께 영남으로 내려가 의령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사로잡았다. 왕은 이를 아름답다고 여겨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내렸다.

(4) 갑진년에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갔을 때, 사신이 가강을 만나

  “양국 백성이 오랫동안 괴로움을 겪어 왔기에 제가 그들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했다. 가강 역시 불교 신자였기에 이 말을 듣고는 신심이 깊어져 사신을 부처처럼 공경하고 곧 화친하여 돌아왔다.

 

 

 위 글은 사명대의 형제 같은 교분이 있었 허균(許筠)이 지은 비문의 일부다. 본 제목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사명당송운대사(四溟堂松雲大師) 석장비명(石藏碑銘)>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 대사께서 태어나신 때는 바로 말세의 혼란기였다. 대사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으시며 강적과 싸우느라 바빴고, 불법을 널리 알리고 어리석은 대중을 계몽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 잘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그가 불법을 무시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데 바빴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귀신을 죽이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불법의 공덕임을 알 수 있겠는가?"

 

 허균의 주장은 그 나름의 논리로 타당성을 찾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승려들의 전쟁 참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이들은

 

“산승의 본분으로 편치 않지만 임금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갔다”(유정),

“산승들도 이 땅의 백성이다. 임금이 도읍을 잃고 도망쳤으니, 좌시할 수 없다”(기허영규)
 
반면 승려의 본분을 철저히 지키고 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려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정관해안),

“부처님도 땅에 오래 묻히면 본심을 모르고 산다”(정관일선)

 

라고 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사명대사는 "모든 중생의 구제가 부처님 오신 목적"이라고 믿었고, 우리 국민뿐 아니라 일본 국민도 전쟁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깨워 평화를 이루고 돌아왔다. 이는 양국이 평화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보살도(菩薩道)의 실천

 사명대사는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진의 길만 걸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참사에 참전하며 세속의 길로 나아갔다. 불교가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살생의 길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유교와 불교 모두에서 옳고 그름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한 그의 충성심, 유생들과의 교류,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면모는 유교적으로 해석되었고, 조정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사대부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의 진정한 마음은 명예를 얻는 데 있지 않고 보살의 자비로운 행실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그의 많은 시에서는 자신의 성취에 대한 자긍심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본래 수행처였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묻어난다. 그의 선시(禪詩)에 나타난 시의 세계를 살펴보면, 사명 대사는 오직 일념으로 특정 보살도를 수행하는 일관된 삶을 추구하며 이를 문학적 형태로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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