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1. 19:06

십우도(十牛圖)와 심리 이야기

1. 심우 : 소를 찾아 나서다

2) 자기 체험을 직접적으로 시도하다

 

심우(尋牛) - 소를 찾아 나서다

 

제1송 : 심우尋牛

 

茫茫撥草去追尋(망망발초거추심)

水闊山遙路更心(수활산요로갱심)

力盡神疲無處覓(역진신피무처멱)

但聞楓樹晩蟬吟(단문풍수만선음)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정신 피로해 소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나뭇가지 울음뿐.

 

 

심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자기 내면에 대한 관찰이 필수적이라고 카를 융은 말한다. 심혼은 자신의 가장 어둡고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식으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고유성은 밖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과 체험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원시적 숲을 헤치고 찾아 나서는 것이다.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라는 문장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엇인가 조금은 허전해 보인다.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도를 닦기 위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거친 풀밭을 헤친다. 그리고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고독한 수행자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행으로 도를 닦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십우도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 세계임을 먼저 떠올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위의 시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수행자의 표면적 고행길을 나타내기보다는, 수행자의 내면적 문제에 대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융의 심리학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으로의 침하를 묘사한다. 무의식으로의 침하는 가장 높은 의식성에 이르기 위한 본격적인 시도다. 또렷한 의식성으로 자연의 정신인 무의식으로 들어가야만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질 수 있다.

 

 일단 번역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면, 발撥이라는 단어가 '제거한다','다스린다'의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무엇을 제거하거나 다스리려고 하는가? 바로 '아득히 펼쳐진 수풀'이다. 한국의 전통적 꿈 해몽에서 잡초는 근심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머리카락이 번뇌로 상징된다. 스님들의 삭발의식 역시 그러한 의미와 연관성을 띄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이 제일 먼저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망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득히 펼쳐진 수풀은 망상에 대한 상징이다. 그리고 그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망상을 잘 다스린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득한 수풀을 어떻게 다 헤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튼 아득한 망상을 헤치고 나아가도 찾는 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망상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어도 여전히 산도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물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소를 찾으려는 사람을 지쳐버리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아득히 펼쳐진 수풀'이라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같은 느낌을 준다. 즉 그것은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그렇다면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라는 표현은 앞의 문장과 왠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만약 발초撥草라는 단어를 '잡초를 제거한다' , '잡초를 다스린다'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휘저어 뒤섞여 있는 잡초'로 바꾸어 해석해보는 것은 어떨까?

 '망망발초茫茫撥草'를 '아득히 펼쳐져 휘저어 뒤섞여 있는 잡초'로 해석한다면 '거추심去追尋'은 '돌보지 않고 구하고 찾으니'로 해석이 된다. "망망발초거추심(茫茫撥草去追尋)은 아득히 펼쳐져 휘저어 뒤섞여 있는 잡초는 돌보지 않고 구하고 찾으니"가 된다. 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임제의 설법을 통해서 이해해보자. 

 

 어느 한 좌주座主가 임제에게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하여 불성佛性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임제가 대답하기를

 "거친 풀밭에는 호미질을 하지 않는 것이니라(荒草不曾鋤)" 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것을 "거친 풀밭에 호미질도 하지 않았구나"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 후자로 해석하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그것은 좌주가 자신의 거친 풀밭을 돌보지 않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임제가 좌주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임제록>을 풀이한 야나기다 세이잔의 '황초부증서(荒草不曾鋤)' 해석을 여기로 옮겨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무명망상(無明妄想)의 거친 풀을 그대로. 번뇌의 근본 성질이 곧 불성佛性임을 선언하는 말. 여기서 不曾이란 일찍이 호미를 댄 일도 없고 앞으로도 대지 않겠다는 뜻. 무명번뇌의 거친 풀 그대로가 깨달음이라는 표현. 즉 번뇌구족(煩惱具足) 보리성취(菩提成就)"

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세이잔의 해석은 단순히 임제가 좌주의 수행 자세나 자질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본성의 근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제가 말하는 '거친 풀(荒草)'은 아뢰야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융의 심리학으로는 집단무의식에 해당한다.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은 의식처럼 길들여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아가 그것에 함부로 노출되어져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은 길들여지는 순간 그것이 간직한 고유한 에너지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면 나약한 자아의 경우, 정신분열증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친 풀'은 정신의 근원으로서 의식의 에너지원이다. 그러므로 임제는 무명망상의 거친 풀을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번뇌가 되는 것은 오직 자아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상대의식에서는 '거친 풀'이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아의 초월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아의 상대의식에 의해서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아의 절대의식에서는 집단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할 뿐이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거할 수도 없지만 제거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을 없애는 것은 정신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어 본다. 부처는 완전하고 중생인 집단무의식은 망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제는

 "일찍이 호미를 댄 일도 없고 앞으로도 대지 않겠다" 

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좌주의 질문을 다시 가지고 와야 한다. 좌주가 

 "삼승십이분교가 어찌하여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것은, 임제가 이 질문에 앞서서 삼승십이분교는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라고 설법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좌주를 만난 그날이 아니라도 언제 어디선가 임제는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는 좌주가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승십이분교가 우선 무엇을 말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승乘이란 중생에 구제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레이다. 즉 수레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이다. 이 방편에는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의 세 종류가 있다. 십이분교(十二分敎)는 경전의 서술 형식과 내용에 따라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임제는 중생을 부처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삼승십이분교가 불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삼승십이분교를 따라서 부처의 길을 열심히 가던 좌주에게는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다. 삼승십이분교에 부처가 없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그가 믿어온 교리를 전면적으로 뒤집어버리는 혁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임제는 왜 삼승십이분교가 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삼승십이분교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생의 세상에서 부처의 세상으로 가는 수레이다. 즉 중생과 부처는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기에 중생과 부처가 어쩔 수 없이 분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아는 끊임없이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 부처의 마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처는 중생과 부처가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중생과 부처는 본질적으로 한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간과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즉 부처에는 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도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이 임제에게는 거친 풀이고, 조주에게는 태고의 쓰디쓴(苦) 샘물이며, 남전에게는 참묘아斬猫兒이다. 이것들은 모두 조사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한 아뢰야식이고, 융 심리학의 원시적 본능인 집단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생긴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붓다는 왜 삼승십이분교라는 그 많은 말들을 남겼을까? 그것은 중생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인 부처를 알지 못하고 중생이라는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라는 위대한 기능이 정신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고유한 부처를 알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가장 요구되는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의식이다. 즉 누구나 자아의식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일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자아구조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믈 확고한 자아구조를 만드는 일이 바로 삼승십이분교가 말하는 교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승십이분교는 확고한 자아구조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훈련장인 것이다. 말하자면 삼승십이분교에는 불성에 대한 판타지만 있을 뿐, 진정한 불성이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불성은 자아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거친 풀(荒草)'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명상하기 위해서 먼저 자아의 초월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아의 초월은 자아의 구조가 확고한 토대를 갖추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초월은 삼승십이분교의 과정을 제대로 거친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견성한 자아, 즉 성품을 본 자아는 스스로 정신의 주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아의 초월은 바로 삼승십이분교의 초월이다.

 

 삼승십이분교는 모두 자아의 상대의식 안에 있다. 자아의 상대의식은 중생인 자신을 버리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의 의식적 내용인 선善적 측면만을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부처의 상像이란 선善의 완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 안의 어두운 성질들을 외면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염원들에 의해서 완성된 모습이 바로 보신불과 화신불이다. 즉 보신불과 화신불에는 악惡적인 측면이라고 불리는 무의식의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이라는 구분은 의식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만 가능하다. 즉 전체성에서 본다면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듯이, 선과 악은 하나다. 융의 표현대로라면 화신과 보신에게는 여전히 무의식의 원시적 성질들은 의식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법신불이 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통합하는 한마음(一心)이다. 화신불과 보신불이 의식적 측면만을 추구하여 이룩한 부분정신이라면, 법신불은 무의식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황벽이 삼승십이분교를 모두 체득하여 보신이나 화신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부처의 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삼승십이분교는 자아의 실현이지, 한마음(一心)이 되는 부처의 실현은 아닌 것이다.

 

 

   

보신과 화신은 모두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그 설하는 법도 개개의 사정에 따르고 기근機根에 대응하여 교도敎導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둘은 진실한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보신과 화신은 진실한 부처가 아니며, 또한 진실한 법을 설하는 것도 아니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원래는 동일한 나의 정명精明일 뿐인데 이것이 나누어져 육화합六和合이 된 것이며, 일정명一精明이라는 것은 바로 일심(一心)이다. 육화합이라는 것은 육근이다. 이 육근은 각기 육진과 화합한다. 즉 눈은 색과 합치하고, 귀는 소리와 합치하며, 혀는 맛과 합치하며, 몸은 감각과 합치하며, 뜻은 법과 합치한다. 그런 가운데 육식이 나와 18계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면 육화합이 하나로 묶어서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바로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고는 있지만 단지 '일정명'과 '육화합'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법에 속박되어 본래 마음과 계합하지 못한다.  <전심법요 · 완등록 연구>

   

 

보신과 화신은 모두 한마음(一精明)에 있는 기능으로서 자아의 염원에 따라 작용하는 현상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들은 결국 부처라는 법에 속박되어 있어서 본마음인 거친 풀과 계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제나 황벽은 깨달음은 무명망상(無明妄想)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지 제거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평상심을 말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평상심에서만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는 곧 수용이다. 이해와 수용은 자기 체험을 직접적으로 시도하고 경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출처 : 상징의 심리학

지은이 : 최명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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