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우도는 상징의 심리학이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1. 18:06

십우도는 상징의 심리학이다

십우도는 왜 상징으로 쓰였을까?

 

 십우도는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열 단계로 그린 그림이다. 십우도의 중심 상징인 소는 본성을 의미한다. 중국에는 십마도十馬圖라고 하여 말의 상징을 쓰기도 하고, 티베트에는 십상도十象圖라고 하여 코끼리의 상징을 쓰기도 한다. 소든 말이든 코끼리이든 본성을 모두 동물로 상징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십우도의 전체 이야기는 모두 상징으로 되어 있다. 즉 소를 찾고, 소를 길들이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이러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왜 이러한 상징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우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화들이 왜 모두 상징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가져볼 수 있다. 십우도나 신화 또는 경전들은 모두 인간 정신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왜 상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안다는 것은 정신의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Alex Grey(1953 ~ ) 작품
'Vajra Horse'
여러 신화에서의 상징들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 신화와 연금술의 상징을 심리학적 의미로 연구하고 해석해 낸 사람이 바로 칼 구스타프 융이다. 그는 집단적 무의식의 심리학을 고대 그리스의 점성술과 연금술에서 발견했다. 또한 창조기원에 관한 신화나 연금술은 모두 원형이 외부로 투사된 결과들이었음을 그는 확인하게 된다. 

 

 융은 고대인들이 자기 내면의 원형을 밤하늘에 떠 있는 행성의 배열에 투사했고, 연금술사들은 원형을 물질적 화합결합방식에 투사했다고 보았다. 즉 고대인들은 정신적 신비를 행성의 배열을 통해서 알고자 했고, 연금술사들은 물질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연금술의 표현방식이 심벌리즘 Symbolism이 된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아낸다. 

 

 

 정신의 기본 골격은 원형에 의해서 구성된다. 원형은 인간의 정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마음의 성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족이나 종족에 국한되지 않는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에는 태곳적 이미지가 간직되어 있다. 이것을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했고, 중세문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원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융은 이러한 원형을 세계 곳곳에서 확인하게 됨으로써 이와 같은 이론에 동의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형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었고 그 내용이 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융은 원형을 집단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말한다. 즉 정신의 이러한 기본적인 공통 원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원형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이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형은 본능적인 경향에 의해서 인도된다. 본능이 개인적 경험이나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처럼, 원형 또한 그러하다. 원형은 의식하지 않는 한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원형을 의식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드러날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원형이나 집단무의식에 대한 이론은 불교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에는 종자種子의 바다로 표현되는 근본정신,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기 때문이다. 야뢰야식 또한 그것의 기능에 따라 함장식含藏識과 이숙식異熟識이라는 별명을 가진다. 원형으로든 아뢰야식으로든 근본정신으로서 정신의 보편성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형에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원형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표현은 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꿈과 환상으로 원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원형의 집단적인 모티브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구조와 형태를 갖춘 종교적 신화를 탄생시킨 셈이다.

 

 말하자면 상징은 원형의 언어이고 표현방식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징의 내용들은 초인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다. 인간 중심의 자아의식으로는 초인간적으로 표현되는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융이 상징을 비의秘儀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융에 의하면 원형은 상징의 창조기능이다. 즉 인간은 원형에 의해서 상징적 환상을 품게 되고 상징적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환영의 이미지들과 관념들이 모두 원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원형의 동일한 형식성은 신화•민간전승•역사자료로 남아 있다.   <원형과 무의식>
 그것은 원형이 인간의 감정적, 정신적 행동양식•윤리관 형성 그리고 대인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전체적 양식을 안다면 누구라도 상징의 숨겨진 의미를 추측하고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상징과 리비도>

 

 의식의 세계에서 볼 때, 신화의 세계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의식이 우월하고 무의식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가 전적으로 다름에 의해서 구분되는 현상이다. 무의식 안에는 의식의 도덕적 세계에서 용납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이 있다. 비현실적인 내용들이 나약한 자아로 하여금 무의식의 세계와 충돌하게 하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수렁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러한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원형 안에 내포된 가능성을 외면할 방법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심혼이 보내는 신호들은 무의식과 분리되어 있는 의식의 일방성에 대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상징과 리비도>

 

 즉 정신은 본래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식만이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부정하고 산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무의식의 내용이 그 어떠한 것을 담고 있든지 간에 의식은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적 상상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이유도 그것이 정신의 근원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세계의 도덕적 관점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본질적 의미는 전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자아의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분리된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아의식의 주관적 특성으로는 원형의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 자아의 초월이 필연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형의 상징성은 오직 무아의 절대의식에 의해서만 그 숨겨진 뜻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융은 원형의 상징적 표현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불길에 싸여 죽는 꿈을 꾼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 고열에 시달리다 죽게 된다. 즉 꿈에 나타난 집은 자신의 몸을 상징하고 있었고 불은 그 자신의 몸에서 나는 고열이었던 것이다. 

 

 원형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충동 사고형식으로 개체가 놓인 상황에 개입한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꿈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다. 원형에는 확실치 않지만 미지의 성질을 지니고 있고, 직관적 파악으로써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한 까닭에 원형적 성질은 의식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거나 의식적 의도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이 왜 의식의 의도를 방해하는지, 무의식은 왜 상징성을 띠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하 수용이며, 의식이 확장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1) 상징은 심혼의 상像들이다

 융은 신화가 정신의 발현으로서 심혼의 본질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화적 상像들은 심혼의 상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원시인들이 경험했던 그 상들이 현대인들의 꿈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원형과 무의식>

 

 신화를 만들었던 원시인들은 외부와 내부의 문제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었다. 의식발달이 미약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내면의 일들조차도 곧 외부의 일들로 경험되었다는 것이다. 융은 이것이 원시인들로 하여금 신화를 만들게 한 근거로 본다. 

 

 즉 원시인들은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보지 않고 심혼의 상상력에 의해서 경험된 신과 영웅의 숙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신화를 심혼에 의해서 억제할 수 없었던 원시인들의 어떤 충동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화가 상징으로 나타나는 이유를 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양, 낙원의 나무, 어머니, 남근으로 나타나는 나무의 변화무쌍한 의미는 나무가 리비도의 상징일 뿐, 이것이나 저것 등의 구체적인 대상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남근적 상징은 성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리비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리비도 또한 비록 그것이 분명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결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리비도에 대한 상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인간 내면으로부터 구성된 상징으로서 자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꿈 또한 인간 정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꿈에 대한 해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활동과 그 족적을 같이 해왔다. 

 

  이미 앞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무의식은 자아의식에 의해서 조종되지 않는 자율적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화를 만들게 하고, 깨달음과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게 하며, 꿈을 통해 개인이 정신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무의식의 정신을 배제하고 의식만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꿈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꿈의 해석도 꿈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꿈이 표현하는 사물과 내용이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융은 나무가 리비도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리비도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적 에너지보다 훨씬 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내적 에너지다. 내적 에너지는 단순한 동물적인 힘도 초월할 수 있다. 즉 육체적 존재를 영적 존재로 성숙하게 하는 힘이다. 

 

 십우도에는 나무와 태양이 출현한다. 그것들은 모두 정신적 에너지의 변환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이 등장하지만 정신의 가장 정점에 이르면 태양이 하늘 높이 뜬다. 융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북유럽 신화의 낙원의 나무Alex Grey(1953 ~ ) 작품 &amp;#39;Tree &amp; Person&amp;#39;

 

 상징은 알려진 어떤 사물에 대한 기호나 비유가 아니다. 상징은 거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 사상만을 암시하려고 한다. 이런 상징들의 제3의 비교가 리비도인 것이다. 의미의 통일성은 오직 리비도 비유에 있다. 이 영역에서 사물의 고정된 의미는 끝이 난다. 

 거기서 유일한 실재성은 리비도인데, 우리는 리비도의 존재를 단지 우리의 실현을 통해서 경험한다. ••••••
 우리는 신화적 상징을 너무 구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매번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신화들의 끝없는 모순에 놀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상像으로 감싸여 있는 무의식의 창조력이라는 것을 늘 잊어버리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상징은 지성과 논리로 알 수 있는 의식적 세계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상징의 세계는 의식의 세계가 무시하고 외면해 왔던 정신의 세계다. 그러므로 의식의 세계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언어인 것이다. 조사祖師들이 말하는 깨달음의 언어를 일반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사들 앞에서 조사의 말을 들었던 동시대의 사람들도 조사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아관념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자아초월을 말하는 조사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융의 설명으로 이해하자면 조사들과 일반 사람들의 리비도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일반인들의 중심적 사고가 자아라면 깨달음을 경험한 조사들의 중심적 사고는 무아다. 자아의식은 현상을 보는 반면에 무아의식은 본질을 본다. 그러므로 일반사람들에게 조사들의 언어는 상징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조사들의 말을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늘 모순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세계는 언어의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상像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상像을 현실로 경험하는 원시인들이 만든 신화가 상징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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