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우도는 왜 상징으로 쓰였을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1. 18:51

십우도는 왜 상징으로 쓰였을까?

2) 상징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다

 융은 원형이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정동(emotion)이라고 말한다. 정동이란 인간을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본능적 에너지와 연결하며, 자신을 위험상태에서 방어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정동은 인간을 존재로서 가능하게 만드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므로 융은 원형에 정동이 없고 상(이미지)만 존재한다면, 그 상像은 언어상 유용할 뿐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동이 없이 상像만 있다면, 원형은 인간을 지켜내고 움직이게 하는 신성한 힘으로서의 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정신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움직이고 결과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상징은 인간의 어떤 감정을 움직이게 하고, 정신적 에너지를 얻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형이 정동을 통해서 살아있는 개체와 통합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기계적인 체계라는 말은 아니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조건이 주어지면 시스템 안에서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다. 

 

 개체가 원형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는, 그 개체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같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에 따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이것이 원형을 기계적인 체계 안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고 하는 이유다. 

 

 또한 이것은 원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든 개체는 개성 혹은 자성自性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성, 즉 존재의 고유성이 원형을 기계적으로 배우거나 인위적인 해석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상징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모든 종교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비밀스러운 계시나 상징들은 심혼이 간직한 장엄한 상像들이라고 융은 말한다. 그러므로 십우도 역시 심혼이 나타내는 깨달음의 상태에서 상상으로 느끼거나 나타나는 상들을 관찰 가능한 형체로 묘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처의 발자국
기독교의 여러가지 십자가
기독교의 여러 가지 십자가

 

•••••• 전해진 상이 아름다울수록, 숭고할수록, 또한 광대하면 할수록 개인적 경험에서는 그만큼 멀리 벗어나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상상으로 느낄 수 있고 감득할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 경험은 잃어버린 것이다. 심리학은 왜 경험과학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겨났으며, 우리는 왜 무의식을 오래전에 발견하지 못했고, 영원한 상들의 보물을 발굴해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심혼의 모든 것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더 광범위한 종교적 형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형과 무의식>

 

 이것은 깨달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을 완전함으로 묘사할수록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멀어진다. 즉 부처를 청정한 것으로 묘사하고, 깨달음을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제거된 상태로 묘사할수록 중생이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영역이 된다. 그것은 깨달음이 현재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를 이룬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소박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직접적인 인식기능인 무아의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게 만든다. 장엄한 종교적 판타지를 모두 제거해 버린 사람들이 바로 깨달음의 화신들인 조사祖師들이다. 조사들은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질문에 '마른 똥 막대기'라고 대답한다.

 

깨달음이나 종교에 대한 자아의 판타지를 여지없이 날려버림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의 실재인 개체로 돌아오게 하는 지혜다. 깨달음이 평상심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평상심 안에서만이 내가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내가 누구인지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위대하고 숭고한 부처의 상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십우도의 상은 참으로 단순하고 현실적이다. 전혀 숭고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숭고함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장면은 열 번째 그림에 있다.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술병을 들고 문을 나서다

 그림에는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저잣거리에 있는 술집에서 술병을 들고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충격적인 모습은 깨달음을 '숭고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관념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부처에 대하여 숭고한 상을 가진 사람들은 그 믿음에 위배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깨달은 부처는 중생들을 구원하러 저잣거리로 간다고 왜곡해서 해석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의 십우도에는 술병을 잡고 있는 그림이 거의 없다. 이것은 상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 준다. 

 

 즉 『해탈의 서』가 묘사한 위대한 깨달음의 스승 파드마 삼바바는 항시 활발하고 어린애 같다고 표현되어 있다. 고귀한 스승은 굉장한 애주가였고, 중독될 정도로 술을 마셨으며,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가 마신 것은 신들의 음료이며, 생명의 영약이며, 불사의 감로였다. 그것을 실컷 들이킨 사람들은 깊이 중독되었고 그리하여 현상세계의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티베트 해탈의 서>

 

 깊이 중독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의식을 잃어버린다는 말에서 그 상징성을 찾아보자. 

 제자들은 깨달음의 세계에 집착하는 자아의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다른 편에서 본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는 평상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즉 자아의식은 부처라는 도덕적 완성자가 되기 위해 무의식을 억압하는 의식 주도적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식의 주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분리된 정신에서 한마음으로의 통합이다. 그러므로 술을 먹고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의식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을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즉 위대한 스승이 술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이 완벽한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지혜였을 것이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이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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