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우도는 왜 상징으로 쓰였을까?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21. 20:10

십우도는 왜 상징으로 쓰였을까?

 3) 상징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상징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징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개성화 과정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도와 같기 때문이다. 십우도에서 나타나는 소의 상징성 역시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하나가 되며 또한 어떻게 전체성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상징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상事象에 대한 암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사상의 암시가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정신의 구조와 정신적 실체다. 그렇기 때문에 융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과 상징>

 

연금술과 상징

연금술의 상징들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한 융은 연금술을 서양의 숨겨진 요가라고 말한다. 

"뱀, 그 희생과 조각냄, 머리 그릇과 금을 만드는 기적, 금속의 영(Metalgeist)들의 변환•••••• 추상적인 금속의 영들은 여기서는 고통을 받는 인간적인 존재이며, 전체적인 과정인 신비스러운 입사식(Initiation, 입문식)에 가깝다
 <인간과 문화>

 

 자아와 진아眞我의 결합을 의미하는 요가처럼 연금술 또한 영적 변환을 상징화(symbolism)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연금술 신화와 동물의 상징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 Uroboros는 연금술사들의 심리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 동물이다. 머리와 꼬리가 하나로 이어져 둥근 모습을 한 우로보로스는 근원적 정신에 대한 상징이다. 

 

 이와 같은 상징은 대웅전의 한가운데 모셔진 불상佛像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불상의 엄지손가락은 중지와 맞닿아 둥근 모양을 그리고 있다. 즉 근원적 마음으로의 회귀다. 

의식의 발달을 위해서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정신이 한마음(一心)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한마음은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표다. 

 

 연금술의 드러난 현상은 화학연구지만 그것의 본질적 의도는 심리학적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화학연구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불변불멸의 물질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기 때문이다. 원물질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면 라피스 Lapis로 불리는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라피스라는 보석은 세상의 부를 가져다주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바로 궁극적 지혜의 상징인 마음의 다이아몬드다. 라피스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믿었던 것도 그들의 화학적 연구가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연금술의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회의적 화학자(The Sceptical Chimist』(1661)를 쓴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이다. 그는 연금술사들을 원소元素의 개념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연금술을 허황된 행적들로 치부해 버린다.

 

 연금술의 상징성이 근원적 정신에 대한 탐구로 되살아난 것은 상징성에 대한 융의 연구에 의해서다. 현대인의 꿈을 관찰했던 융은 꿈이 보여주는 상징들이 연금술의 상징들과 적지 않게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당시의 의식이 어떻게 신비로운 과정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물질적인 것으로 향하는지, 어떻게 신비로운 투사가 관심을 신체적인 것으로 이끄는지 볼 수 있다."  <인간과 문화>

 

 불교가 무의식의 심리적 과정을 마음 그 자체로 이해하고 각성하는 직접적인 방법론이었다. 그렇다면 연금술은 무의식의 심리적 과정을 물질에 투사함으로써 증명하는 간접적인 방법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물질에 투사하고 그것을 다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방법으로 각성을 시도한 것이다. 

 

 연금술적-신비적 과정의 표현을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생명이 없는 사물의 의인화는 원시적, 고대적 심리학의 잔재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무의식적인 동일시, 소위 "신비적 참여"에 기인한다. 무의식적 동일시는 무의식의 내용을 하나의 객체에 투사함으로써 생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우선 겉보기에는 객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질로서 의식이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개개의 흥미 있는 객체들은 크고 작은 정도의 투사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원시심리학과 현대적 심리학의 차이는, 이차적으로는 단계의 차이다. 의식의 문화발달은 본질적으로 확장적이다 : 의식은 한편으로는 습득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투사를 거두어들임으로써 확장된다. 투사되었던 것이 심리적 내용으로 인식되고, 심리적인 것과 재통합된다.  <인간과 문화>

 

Alex Grey (1953~ ) 작품
'Visionary Origin of Language'

무의식과의 동일시는 무의식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즉 의식성의 부재다. 내면을 의식하지 못하면 내부적 내용들을 외부로 투사한다. 이처럼 외부로 투사하여 보는 것은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은 외부로 발달되어 있다. 투사는 자기 내면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일어난다. 

 

 즉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아는 스스로 분리된 정신의 주체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아의 관점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주관적 사고체계에서는 상징의 경험조차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주관성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집착이다. 

 

 실제로 종교적 세계에서는 그런 일들은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즉 자아의식이 원형에 있는 수호신의 상징을 경험할 때, 자아는 그 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동일시의 현상으로 자아는 스스로 세상을 구제할 메시아나 미륵불 혹은 영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무의식성이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일으킨다. 

 

 상징은 본질적으로 정신의 근원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에 접근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아라는 무의식성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질에 대한 자아의 왜곡된 해석을 막기 위하여 위대한 종교적 경전들은 '현실적 진실'보다 '상징적 진실'을 선택하여 기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융이 상징적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모든 충동에는 육체적 충동과 정신적 충동이 있다. 그런데 육체적 충동과 정신적 충동의 근원은 같다. 리비도는 육체적 감각에 쉽게 이끌린다. 

 

 의식의 에너지가 약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길보다는 단순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사용하는 근본적 진실은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상징은 육체적 감각에 쉽게 이끌리는 리비도를 해방시켜 영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리비도는 생명력을 표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명력은 육체적 에너지와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그러므로 그것을 나무로 표현한다면 직접적으로 육체적인 측면과의 연결을 지연시킴으로써 정신적인 측면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즉 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낳은 불행한 역사의 한 예로 융은 주신酒神 바쿠스의 비밀제의를 언급하기도 했다. 바쿠스와 같은 현상이 지금도 여전히 현실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상징적 진실의 새로운 기초, 심정心情뿐만 아니라 오성悟性에도 호소하는 그러한 기초가 수립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인류가 어찌하여 종교적 표명들의 비개연성에 대한 필요를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감관적으로 지각되고 만질 수 있는 세계의 현존 위에 전혀 다른 종류의 영적인 실재성을 둔다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상징적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정신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일반적 관념으로 상징을 해석한다면 상징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치는 일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과 무의식은 전적으로 다른 체계이고, 상징은 무의식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정신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곧 정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징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신이 왜 하늘에 산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는지, 사람은 왜 자신을 중생이라고 결론지으며 위대한 부처가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지 ••••••, 이와 같이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모든 것들이 바로 정신이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Alex Grey (1953 ~ ) 작품
'Adam &amp; Eve'

  

 물론 융은 현대인들의 상상력은 조상들의 상상력과는 현저하게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옛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신神 혹은 정신적 철학이나 신념이 있었다면, 현대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물질, 경제, 돈이 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원형의 또 다른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근원인 원형으로부터 인간은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원형의 작용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상징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근원적 상像은 비유적 언어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정신의 전체성을 위하여서는 상징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체계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를 찾으러 나서는 것이 부처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일단 자아의식의 경험 체계 안에 있는 '부처'는 맑고 깨끗함(淸淨)이다. 그런데 소는 부처와 정반대의 생명 덩어리로서 에너지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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