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의 동물 윤리와 애완동물의 실태
2021년 7월, 법무부는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새로운 조항을 도입한다는 입법예고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그전까지 동물은 물건으로 취급되어 왔다. 동물은 물건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이 소유한 동물을 다치게 하거나 죽였을 경우, 재산 피해만 배상하면 되었다. 만약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조항이 만들어지면,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학대를 당했을 경우 형사 처벌까지 받게 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특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이 조항의 도입을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화가 과연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해 왔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지금까지 동물 윤리나 동물 복지는 소위 '공장식' 축산에서 잔혹하게 사육되는 농장 동물이나 인간을 위한 신약 개발을 위해 희생되는 실험동물에만 집중되어 왔다. 그런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의 애정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반려동물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법적으로 사람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이 아닌 사람은 사고팔거나, 양도하거나, 담보로 삼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인간이 이렇게 취급되었던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조선 시대의 노예,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물건처럼 사고팔려 후손에게 물려졌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동물이 물건이 아니라면, 동물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반려동물은 펫샵 쇼윈도에 물건처럼 진열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들인다. 그곳에서 팔리는 강아지들조차 공장에서 물건처럼 만들어진다.
현재 펫샵에서 판매되는 강아지들은 대부분 '강아지 공장'이라는 곳에서 번식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작고 귀여운 개를 선호하기 때문에 강아지 공장에서는 그런 개를 번식시킨다. 인간의 경우, 개량된 인간을 인공적으로 번식시키려는 시도는 히틀러의 우생학을 연상시키는 극도의 혐오의 대상이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물건이 아닌 동물에게 번식이 허용될 수 있을까?
현재 개를 키우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귀여움 때문에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이나 가축을 지키기 위해, 또는 사냥을 위해 개를 키웠지만, 현대 도시 문화에서는 귀여움을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를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의 이러한 탐욕으로 인해 생겨난 장모종 개는 시야를 가리는 긴 털 때문에 위생 문제를 일으키고, 주둥이가 눌린 단두종 개는 기도를 막는 증후군을 앓게 된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인위적으로 장애를 만들어 낳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모든 반려동물의 근본적인 문제는 평생 귀여움을 유지하도록 길러진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운 사람들은 평생 자신의 귀여움을 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소망일 뿐이며, 아이들은 성장해야 한다. 반려동물은 이러한 소망을 대리 만족시켜 준다. 반려견은 야생 동물인 늑대가 어린 시절의 귀여움을 평생 간직하도록 진화했다. 이것을 유형성숙(幼形成熟)이라고 한다.
성견은 귀여움을 유지하는 대신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주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는 주인 없이 캔 사료를 먹거나 산책을 할 수 없다. 물론 어린이와 장애인도 타인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어린이의 의존은 청소년기에 국한되고, 장애인의 의존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 반려동물은 평생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글에서는 처음부터 '펫(pe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에 불편함을 느낀다. '애완'의 '완'은 장난감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려동물은 동물을 장난감처럼 대한다.
그래서 요즘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이는 동물을 평생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반려동물'로 더 적합한지, 아니면 '애완동물'로 더 적합한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돈 주고 사서 주인의 취향에 맞춰 개량하고, 주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만든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반려동물에게 '주인'이라는 단어는 사용해서는 안 되기는 하다.
이러한 의존성은 특히 아파트 단지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한국에서 심각하다. 한국은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귀엽고 작은 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개들을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키우는 개들(요즘은 농담으로 "시고르잡종"이라고 부른다)과 비교해 보라.
반려견은 가축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늑대와 같은 종이다. 따라서 무리 지어 살거나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야생적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버려져 산에서 들개로 변한 개들을 생각해 보라. 그런 개가 하루 종일 작은 집에 갇혀 있고, 가끔 목줄을 매고 산책을 하는 것이 과연 개에게 행복한 삶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애완동물 혹은 반려 동물로서의 성찰
남을 생각하는 것은 모든 윤리의 근본이다.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서는
“그들이 나와 같고 내가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게 두어서도 안 된다”(705)
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남을 생각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을 생각하는 것은 비살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강제 노동이 필요하지 않고 매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이 제공된다 하더라도, 누구도 감금되고 묶인 노예의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와 같고 내가 그들과 같다면, 애완동물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만 년 넘게 사람이 길들여 온 동물을 야생으로 풀어주는 것은 동물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된다면, 현재의 가축을 야생으로 풀어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애완동물 사육 방식이 동물들이 선호하는 삶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애완동물 중 개를 주로 다루었지만, 고양이 또한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이 키우고 있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개와 달리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산책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개보다 문제가 적다. 문제는 고양이의 사냥 본능이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사냥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다른 놀이로 대체하는 것이 옳은지는 차치하자.
현재 문제는 한때 '도둑'이라고 불렸던 길고양이, 버려진 집고양이들이다. 배고픈 길고양이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자동차와 화단을 파괴하며 온갖 지저분한 환경을 만들지만, 더 심각한 것은 쥐뿐만 아니라 새와 같은 작은 동물까지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길고양이에게 먹이와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캣맘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캣맘은 길고양이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길고양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동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길고양이가 굶어 죽는 것을 막음으로써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키지만, 반대로 길고양이가 다른 동물을 죽이도록 방치함으로써
"다른 동물이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사물을 사랑과 애정으로 대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을 사물처럼 대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