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자 물리학으로 본 불교사상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4. 20. 15:04

양자 물리학으로 본 불교사상

뉴턴역학의 성공과 양자역학의 등장

 갈릴레오에서 시작된 현대 물리학은 뉴턴 역학으로 완성되었다. 뉴턴은 천문학자들에게 골칫거리였던 행성과 혜성의 운동을 만유인력의 법칙과 역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이는 모든 천체의 운동이 만유인력이라는 단일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천지가 동일한 역학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천지가 동일한 세계라는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등장하면서 뉴턴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견되었다. 이후 측정 기술이 발전하고 측정 범위가 확대되면서 뉴턴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역학의 영역 안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대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20세기 초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다.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양자역학과 양자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를 구성하는 물체의 역학을 다룬다. 양자역학에서 양자는 한국어로 '덩어리' 또는 '알갱이'를 의미하며, 전자, 양성자, 중성자, 기본 입자, 그리고 그것들로 구성된 원자, 그리고 빛의 입자인 광자를 포함한다. 원자와 광자를 통해 양자의 극히 미세한 본질을 살펴보겠다. 탄소 2kg에는 10조 x 10조 개의 탄소 원자가 있으며, 30와트 전구는 초당 100억 x 100억 개의 광자를 방출한다. 양자는 매우 작아서 우리의 눈과 몸으로 감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자를 셀 수 없고 빛을 알갱이로 느낄 수 없다. 양자역학은 우주가 이러한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측정 행위와 양자암호

 양자는 매우 작기 때문에 거시 세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현상도 양자 세계에서는 발생한다. 넓은 의미에서 이는 모두 측정과 관련이 있다. 거시 세계에서는 측정 대상의 상태가 측정하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여기서 '객관적'이란 측정 행위와 관계없이 측정 대상 자체의 물리량이 전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측정을 위한 이러한 명백해 보이는 전제 조건은 거시 세계와 달리 양자 세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 암호학은 측정 행위가 양자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두 사람이 양자 통신을 하고 있고, 누군가가 그들이 주고받는 양자를 가로채서 통신을 도청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그러나 측정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측정하려면 어떤 종류의 측정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약 이 정보를 아는 사람이 양자 통신을 하는 두 사람뿐이라면, 도청자가 양자를 가로채서 측정하더라도 그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더 나아가, 측정은 양자 상태를 변화시키는 흔적을 남긴다. 이러한 추적 정보를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도청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완벽하게 안전한 양자 암호화 통신이 가능하다.

 

 양자 세계에서는 측정 대상을 바꾸지 않고는 측정이 불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러한 상황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원리이다. 광자가 진동 방향을 바꾸지 않고 편광판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양자 통신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청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자의 위치를 ​​확실하게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아내려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한다. 따라서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의 궤적과 원자핵을 공전하는 전자의 궤적은 완전히 다르다. 뉴턴 역학을 모르더라도 행성의 위치는 과거 관측 데이터만으로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반면 전자의 위치를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전자구름과 같은 확률 분포로만 표현한다. 

 

 입자의 이중성과 양자 상태

 
 양자역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측정과도 관련이 있다. 빛은 간섭하고 회절하기 때문에 20세기 이전에는 파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흑체 복사, 광전 효과, 그리고 계산 효과에서는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경우 빛은 입자처럼 행동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에 입자로 여겨졌던 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입자처럼 행동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파동의 특성을 보인다.
 
 입자로 여겨졌던 전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고, 파동으로 여겨졌던 빛은 어떤 상황에서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고 한다.
 
빨간 사과는 빨간색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용을 살펴보겠다. 측정 대상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양자 상태는 고전 물리학이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상태와는 상당히 다르다. 고전적 대상의 상태는 측정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은행 잔고를 확인할 때, 잔고는 확인 수수료 이상으로 변동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양자 상태는 그렇지 않다. 측정은 양자 암호, 편광, 이중성, 스핀 등에서 양자 상태를 변화시킨다. 양자 통신에서 측정 정보를 모른 채 측정하면 양자 상태가 변한다. 편광판은 광자의 진동 방향을 바꾼다. 파동처럼 행동했던 광자는 상황에 따라 입자처럼 행동한다. 입자처럼 행동했던 전자는 상황에 따라 파동처럼 행동한다. 
 
 

 측정의 한계, 그리고 마음이 그린 상태

 양자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이유는 측정이 측정 대상 자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 상태는 우리가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편광의 예를 살펴보겠다. 편광을 측정하고 광자가 위아래로 진동하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는 광자가 위아래로 진동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동서) 방향으로 진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서 방향으로 진동할 가능성을 배제할 뿐, 대각선 방향으로 어떻게 진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과일이 빨간색이라는 사실이 과일이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 둥글거나 길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진동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 위아래 또는 동서를 측정할 때 대각선 방향의 진동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수학적 구조의 특성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상하 및 동서 방향의 진동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대각선 방향의 진동에 대해서는 더 적게 알게 된다. 위아래로 진동한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수록 대각선 진동의 불확정성은 커진다. 이는 불확정성 원리 때문이다.

 측정은 측정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양자역학에서 측정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한 면만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한 면을 완벽하게 안다면, 다른 면은 완벽하게 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한 면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게 되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다른 면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결국 양자 상태는 측정 대상의 전체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한 면에 대한 정보이며, 설령 그 정보를 얻었다 하더라도 다시 측정을 한다면 그 정보는 지워질 것이다. 그것은 측정 대상과 분리된 대상의 객관적인 상태가 아니다. 양자 상태는 측정 대상 자체의 상태가 아니라, 측정을 통해 얻은 정보에 기반한 측정 대상의 판단이며, 측정 대상에 규정된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대상에 부여한 것이다.

 

양자 역학으로 보는 사과의 색깔

 우리의 일상생활

 사물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양자역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과를 볼 때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고 말한다. 양자역학 용어를 빌리자면, 사과는 빨간색 상태이다. 그렇다면 사과는 정말 빨간색일까? 아니다. 사과 표면은 단지 빨간색 파장의 전자기파를 방출할 뿐이다.

 

 전자기파는 우리 눈의 망막을 자극하고, 이 자극은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며, 우리의 뇌는 이를 빨간색으로 해석한다. 사과가 빨간색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사과를 빨간색이라고 그렸기 때문이다.
 사과는 결코 빨간색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의 뇌는 사과가 빨간색이라고 그렸고, 우리는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으며, 사과가 빨간색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자와 광자는 결코 파동이나 입자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파동과 입자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것들이 파동으로 나타날 때는 파동이라고, 입자로 나타날 때는 입자라고 불렀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그것들을 파동이나 입자로 그렸을 뿐이다.
 

 불교에서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그린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우주가 아니라 세상이다. 화엄경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겠다.

 

    若人知心行(약인지심행)   普造諸世間(보조제세간)
    마음이 움직여 모든 세간을 두루 짓는다는 것을 안다면

   是人卽見佛(시인즉견불)   了佛眞實性(요불진실성)
   이 사람은 바로 부처를 본 것이고 부처의 참 성품을 깨달아 안 것이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