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십우도는 근원적 세계에 대한 발견이자 엄청난 신비다
융은 우리가 무의식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을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근원적 세계에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 인격이다. 그러나 의식적 인격은 근원적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으로 들어가는 자는 자신의 의식된 자아인 격을 무의식의 주도적인 흐름에 맡긴다. ⦁⦁⦁⦁⦁⦁ 사람들이 퇴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퇴행은 결코 '어머니'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를 넘어서, 말하자면 출생 이전의 '영원히-여성적인 것' , 즉 원형적 가능성들의 근원적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거기에서 '모든 피조물의 상들에 둘러싸여 떠다니며', '신적神的인 아이(göttliches Kind)'는 자신의 의식화를 기다리며 잠자고 있다. 이 아들은 전체성의 배아인데, 그 고유의 상징을 통하여 전체성의 배아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고래가 요나를 삼켰을 때, 그는 거대한 고래의 배 안에서 그저 잡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파라겔 수스가 이야기했듯이 '엄청난 신비'를 보았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신적인 아이 (göttliches Kind)는 자신의 의식화를 기다리며 잠자고 있다'는 이 말을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인 장식藏識과 유비된다. 장식은 근원적인 청정무구한 의식이 드러나지 않아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적인 아이'에 대한 표현은 '여래장이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능엄경』의 말과도 연결된다. 여래장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부처로 분화되지 않는 '신적인 아이'다.
여래장은 깨달음의 본성으로서 우주의 근본진리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의 본성으로 참마음이다. 여래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참마음으로서 어디에나 편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여래장이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야 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장을 찾아 부처로 분화시켜야 하는 운명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의식화를 기다리고 있는 신적神的인 아이를 깨우는 일이다. 그 신적인 아이는 전체성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이 신적인 아이의 수태는 아버지인 의식과 어머니인 무의식의 관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기이하고 초자연적 현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태어난 자가 바로 자신을 낳은 자"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이기 때문이다. 융은 동정녀의 모티브를 여기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성이 본래부터 모든 생명체에게 갖추어져 있는 근본 성품이라는 것에 대한 신화적 은유인 것이다.
신적인 아이가 잠들어 있다는 말은 의식의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으로 있다. 의식이 인식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귀중한 보석이라도 그것은 보석이 될 수 없다. 마음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를 찾기 위해서, 혹은 잠들어 있는 신적인 아이를 깨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된다. (見道分) 왜냐하면 신적인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을 알려고 하니 혼돈의 도가니다. 불구덩이와 같은 혼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선 혼돈을 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다. 혼란된 마음을 정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혼돈의 주범을 찾아야 한다. 혼돈은 번뇌에서 온다.
번뇌의 주범이 바로 '나'라는 생각의 주인인 자아다. 자아는 의식을 보호하고 키우는 보모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주인이라고 착각한다. 모든 혼란은 너무 작은 힘을 가진 자아가 거대한 무의식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혼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자아는 반드시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융은 이것을
"'나(小我)'의 우월성을 과감히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구체적으로 정신의 객관적인 힘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일종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티벳 사자의 서>
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신의 객관적인 힘이란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무아를 인식함으로써 스스로 인식의 주체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수도분修道分)
무아의식의 앎이 바로 『능엄경』에서 말하는 무루학無漏學이다. 무루는 무아다. 무아에는 '나'가 없기 때문에 번뇌도 없다. 자아의 앎은 유루지有漏智이고, 무아의 앎은 무루지無漏智다. 자아의 앎이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지만, 무아의 앎이란 절대적이고 전체적이다. 무루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아는 존재가 아니라 명료한 의식성이라는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는 무아의 절대의식은 현상에 대한 인식과 진리를 철저하게 취득한다. (구경究竟)
이것이 바로 성불이다.(증과분證果分)
그러므로 신적 아이가 깨어나는 일은 그야말로 '엄청난 신비'가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 자아가 무명을 깨우쳐 '신적 아이'로 있는 불성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하여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융은 자아가 죽고 개성화된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 '새로운 인격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인격의 탄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육과 영의 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는 영웅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의 아들이 되는 불멸의 반신半神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소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그만큼 의식이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성숙한 의식이 소를 찾으러 가야만 하는 이유는 암소가 태양을 낳기 때문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암소가 낳은 태양이 바로 전체성의 배아로서 '신적인 아이(göttliches Kind)' 다.
신적인 아이는 자아인격이 자신을 의식화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동안 암소의 품에서 잠자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을 알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소를 찾지 않고서는 부처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안에 잠자는 불성을 깨우는 일은 곧 의식의 성숙함에 의해서다. 태양의 상징은 최고의 의식성이다. 부처인 무아의식은 암소로 상징되는 무의식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부처는 소의 아들이기 때문에 소를 만나야 부처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부처를 만나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불성에 의해서만이 본격적인 무의식의 의식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체계와 무의식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자아의 초월은 필수적인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는 한, 자아의식은 무의식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과 동시에 죽이는 본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바로 무의식의 이와 같은 이중적 특성에 근거한다.
옛 사람들이 무의식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융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동굴에 살면서 삼키는 어머니로 표현되는 용은 예전에는 인간의 제물을 통해, 나중에는 현물現物 봉헌을 통해 달래야 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여기서 우리는 용왕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 심청이 바다에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심청은 바다에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연꽃으로 피어올라 왕비의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