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끌어가는 힘은 욕망인가?
"욕망을 버려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님들의 설법 속에서나, 절에 가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불자들에게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버리고 나면 무슨 힘으로 살아가나요?"
일반적, 평균적인 사람에게는 욕망이 바로 삶을 끌고 나가는 힘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이야말로 사회 자체를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근본 전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욕망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몇 배나 더 소비함으로써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개인과 사회의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사회에서 욕망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꿈과 같고 거기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혼자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립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성인(聖人) 수준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성인 수준의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논의가 필요 없을 것이다. 필자는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떨까?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고귀한 가르침을 반복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현실 세계는 욕망을 쫓는 삶이며, 때로는 사찰에 가서 성찰하거나, 고귀한 영적 가르침을 오락거리로 삼아 그런 삶을 추구하는 척하며 이원론적인 사람이 되는 삶이다.
결과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설령 그 이상을 따를 힘이 없더라도, 욕망 없는 순수한 삶이라는 이상을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삶을 사는 존재의 삶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질문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삶을 이끌어갈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표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원'과 '욕망'은 양립할 수 없나?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준비되어 있다. 욕망 없는 삶을 이끄는 힘은 '서원'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 '도를 추구하는 마음' 등 다양한 단어가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단어를 합치면 모두 '서원'이라는 단어로 돌아간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사대서원(四弘誓願)'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중요한 전환점이다. 욕망과 서원은 뿌리가 전혀 다른 것일까? 욕망을 없애고 서원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구조일까? 그렇다면 욕망과 서원은 공존할 수 없다.
번뇌는 깨달음이며,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고,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라는 대승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욕망과 서원을 그렇게 상반되는 관계로 볼 수 없다.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욕망에 '나쁜 것[惡]'이라는 구별을 붙이는 것은 불교가 될 수 없다.
불교가 근본적으로 견지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있는 그대로'가 아닐까? 욕망은 그저 욕망일 뿐이다. 선과 악의 개념을 붙이는 것은 새로운 고통의 근원을 만드는 쓸모없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선과 악의 구별을 욕망이나 서원에 붙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욕망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욕망에 너무 끌리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옳다. 불교에는 수십 명의 승려가 몸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수행 방법, 즉 몸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중생의 모습을 구하기 위해 제시된 부정관(不淨觀) 수행 때문에 자살한 어두운 역사가 있다.
욕망에 지나치게 끌리는 것을 막기 위한 부정적인 묘사도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욕망을 버리라는 가르침에 사로잡혀 현실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냉소적인 태도로 무관심하게 살며, 불교의 가르침을 고귀한 장식품으로 여기고 욕망을 중심으로 삶을 사는 불교도들이 바로 그러한 예가 아닐까?
욕망과 서원이 '둘이 아님'을 가르치는 『유마경』
만약 중생은 단지 중생일 뿐이고 부처는 중생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면 어떨까? 번뇌가 진정한 번뇌이고 깨달음이 번뇌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방법이 없다. 둘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둘일 것이다.
단순히 '둘이 아니다(不二)'라는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과 서원 또한 '둘이 아니다'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둘이 아니다'를 가르치는 가장 유명한 경전인 유마경에서 우리는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하는 위대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유마경은 모든 그릇되고 거짓되고 악한 것의 씨앗이 되는 본성이 부처의 씨앗이 되는 본성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버린 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계발할 수 없다고 한다. 마하가섭은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탄식한다. 그들처럼 번뇌를 완전히 내려놓고 수행한 아라한들은 부처를 이루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은 부처의 씨앗을 썩혔다! 아라한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를 이원론적으로 고착시키는 관점에서는 결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말들이 불교의 잘못된 모습을 드러내는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러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통해 우리 현실 속의 잘못된 불교상을 드러내고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마경에는 그러한 변화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를 힘찬 발걸음으로 이끄는 감동적인 구절이 있다.
연꽃은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야 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의 저변에 깔린 분별력을 깨뜨리는 상쾌한 구절이다. 소승불교는 연꽃은 고귀하고 진흙은 더럽다는 구분에 집착하는 것이며, 그 구분을 깨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이 지점에 바르게 서는 것이 우리 불교를 바르게 정립하는 길이다.
잘못된 방향성에서 벗어나 자비 실천의 깨달음으로
욕망은 더럽지 않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힘이 거기에 뿌리내리고 있다. 만약 그 힘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른 힘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저열하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꿔야 한다. 그 안에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퍼져나가야 할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 얽혀 있다.
문제는 바로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우리 주변에 묶어두려는 잘못된 방향이다. 지혜의 눈이 열리고 자비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이 열릴수록, 그것은 점차 서원의 형태로 변한다. 서원이라는 단어는 원래 무슨 뜻일까? 올바른 목표를 향한 큰 소원을 빌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소원’은 본질적으로 욕망과 다르지 않다. 단지 나에 대한 집착을 중심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바람인지, 아니면 나와 너, 그리고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올바르고 건강한 방향을 가진 바람인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욕망이 이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리는 우리 생명체의 모습. 그런 모습을 더럽다고 하지 말자. 하지만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까지 생각하는 소중한 마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답게 피어날 연꽃의 씨앗이 아닐까?
자신도 아름답게 바라보자. 고집에 머물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을 뜨고, 자신에게만 몰두하지 않고, 더 큰 바람을 갖는 모습에서 성스러운 서원의 완성이 약속된다고 믿는다. 욕망과 서원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관점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는 위대한 서원은 여기서 열린다. 자기애에서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여기서 시작된다. 부정적인 시선과 긍정적인 시선의 차이는 처음에는 미미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천지를 가르는 실천의 전환점이 된다.
욕망과 서원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올바른 눈, 그리고 그에 기반한 참된 수행! 분명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