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8아뢰야식은 의식, 두뇌, DNA와 어떻게 다른가?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4. 18. 14:12

제8아뢰야식은 의식, 두뇌, DNA와 어떻게 다른가?

의식, 두뇌, DNA

1) 의식 또는 무의식

 경험의 축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먼저 과거를 기억하는 의식을 떠올린다. 책을 읽을 때 책의 내용은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고, 과거의 경험 또한 기억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남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기억하거나 지각하는 범위는 우리의 전체 경험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다.

 

 우리의 감각이나 의지가 경험하거나 바라는 것들은 그 순간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나중의 기억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한 모든 내용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의 의식보다 조금 더 넓은 무의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무의식을 개별 의식의 퇴적물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무의식은 의식으로서 포괄하는 범위에 있어서 동일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의식과 무의식은 물리적 세계 자체와 그 안에 뿌리내린 실체, 객관적 실체로서 나타나는 개별적인 자아 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이나 무의식 중 어느 하나가 각 개인이 경험하는 각각의 몸(뿌리)과 세상(세계)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들이 모든 씨앗의 저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2) 두뇌

 다음으로 쉽게 떠오르는 곳은 사람의 경험의 내용인 정보가 저장되는 뇌다. 인간의 뇌는 오감(五感)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감각 자료)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중앙 정보 처리 시스템 역할을 한다. 출생 이후 감각, 여섯 번째 의식, 일곱 번째 마나식의 활동을 통해 얻은 모든 정보나 씨앗은 수억 개의 뇌신경의 시냅스 연결을 통해 연결되어 특정한 뇌 신경망과 특정한 인지 체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모든 정보와 씨앗은 뇌 신경망에 축적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 신경망에 따라 그 신경망을 통해서만 대상 세계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뇌를 인과체와 인과체를 형성하는 모든 정보나 카르마가 저장되는 장소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뇌는 대상 세계에 속하는 물리적 색채 법칙이며, 인과체의 일부이다.

 

 육신은 죽으면 사라지므로, 뇌는 생사를 초월하여 업이나 씨앗을 보존하고 보상을 산출하는 씨앗의 저장소가 될 수 없다. 비지냐나(Vijñāna)가 말하는 종자 저장소는 생명체의 몸을 형성하는 업력, 기운,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만, 뇌 신경망은 그러한 방식으로 담긴 씨앗과 에너지가 구체화되고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씨앗이 실현되고 드러난 결과는 종자 저장소라고 할 수 없다.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은 개체의 몸이 죽어 중간 존재(中有)를 형성하고 또 다른 몸을 형성할 때 남는 업과 에너지다. 반면 뇌 신경망은 아뢰야식에 있는 씨앗이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난 결과다. 따라서 뇌는 업, 씨앗, 정보의 저장소라고 할 수 없다.

 

3) DNA

 정보나 경험의 씨앗이 개별 유기체의 한계를 넘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DNA는 사람들이 정보 저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류와 온 우주의 역사가 각 유기체의 DNA에 유전 정보로 기록되어 남아 있으며, 각 개인의 몸과 생식기는 그 유전 정보에 따라 창조되고, 목표 세계는 각 몸(생식기)에 따라 나타나므로, 궁극적으로 DNA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씨앗의 저장소로 여겨진다.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유전 정보의 기본 단위는 유전자이고, DNA는 그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정보 저장소다. 그러나 DNA는 A(아데닌), G(구아닌), C(시토신), T(티로신) 염기가 나선형으로 배열된 고분자 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 즉 고분자 물질이다.

 

 DNA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핵에 있는 염색체에 담겨 있으며, 두 사람의 유전 정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식 세포에서 나누어진 염색체의 결합을 통해 자녀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유전 정보의 저장소라고 할 수 있는 DNA는 염기로 이루어진 고분자 물질이며 궁극적으로는 육체에 속한다.

 

 수명이 다하고 사망하면 육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부패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염기 서열의 DNA도 사라지며 유전 정보도 함께 사라진다. 어떤 정보가 물리적인 USB에만 저장되어 있다면 USB가 파괴되면 그 정보도 사라진다. 죽기 전에 자녀가 있다면(다른 USB에 다운로드) 유전 정보는 남지만, 자녀가 없이 죽으면 유전 정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은 자녀가 있든 없든 성립하며, 죽음을 넘어서서, 즉 개인의 육체가 소멸하는 것을 넘어서 성립한다. 따라서 DNA는 뇌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운반자, 즉 생사를 초월하여 씨앗을 보존하고 궁극적으로 과보를 낳는 씨앗(정보)의 저장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아이를 낳을 씨앗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담겨 있으며, 그 아뢰야식이 이 세상의 몸을 창조할 때, 그 씨앗의 에너지와 가장 유사한 부모와 자식의 씨앗을 부차적인 원인으로 삼는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DNA의 유사성이 확립된다고 여겨진다.

 

아뢰야식의 자기 자각성

 아뢰야식의 자기 자각성

 의식도, 뇌도, DNA도 아닌 정보 저장소로서 아뢰야식은 어떤 존재일까? 정보의 발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식과 유사해 보이고, 정보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뇌 신경망과 유사해 보이며, 태초부터 경험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전자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뇌와 유전자는 가시적인 물리적 실체로서 감각 대상의 영역에 속하며, 의식은 그러한 대상을 반영하는 유한한 의식이다.

 

 정보를 아뢰야식과 관련지어 논하면, 공기 중에 무한한 정보를 담고 있는 구름에 비유할 수 있다. 의식, 뇌, 유전자는 구름에서 불러온 데이터, 즉 이미 실현되어 드러난 현상에 해당한다. 반면 아뢰야식은 구름처럼 온갖 정보가 머무는 허공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뢰야식을 허공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자각, 본래적 각, 본각(本覺)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야식은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전체(一)이며, 무감각한 허공과 달리 마음(心)이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의 마음(一心)입니다.

 

원효는 이러한 아뢰야식의 자각을 "성자신해(性自神解)"라 했고,
지눌은 "마음이 허공처럼 텅 비어 있고 고요하여 스스로를 신성하게 안다(空寂靈知)"

 

라고 했다. 이러한 깨달음의 힘으로 우리는 마음속의 모든 정보를 감지하고, 때로는 불러내고, 때로는 찾고, 때로는 놓칠 수 있다. 이렇게 씨앗 저장고를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는 핵심은 저장이나 담음을 의미하는 '아라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나 깨어 있음을 의미하는 '식(識)'에 있다.

 

 아뢰야식을 의식으로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저장된 씨앗이나 정보가 아니라, 아뢰야식 자체가 깨어 있음으로써 그 안에 있는 씨앗을 받아들이고, 유지하고, 활성화시켜 그 씨앗을 살아있는 씨앗으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아뢰야식이 씨앗의 저장소로 기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뢰야식의 자각성이다.

 

 아뢰야식은 그 안에 무수한 생에서 나온 무한한 양의 씨앗을 담고 있기 때문에, 깨어나지만 제한된 정보를 가진 개인의 의식이나 무의식과 구별되며, 깊은 마음으로 깨어나는 것은 자각의 의식이기 때문에, 무수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물질인 뇌나 DNA와 구별된다.

 

아뢰야식의 깨달음 또는 깨달음의 의미는 ‘고요함’과 ‘성스러움’을 모두 유지하는 수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요함(寂寂)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의 대상으로 향하지 않고 마음 자체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을 쫓는 피상적인 의식이나 산만한 마음이 아닌 깊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함(惺惺)을 유지한다는 것은 쫓는 대상이 마음에서 사라질 때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함께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깊은 마음의 본래의 깨달음을 자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상이 마음에서 사라질 때 마음은 대상의식인 여섯 번째 식보다 더 깊은 깊은 마음으로 나아가고, 그 상태에서 깨어 있어야만 비로소 깊은 마음을 자각하게 된다.

 

 『기신론』에서는 이러한 심심의 자각을 마음의 ‘본연적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본각(本覺)’이라고 했다. 원효의 『성자신해』와 지눌의 『공적영지』는 이러한 본각, 즉 심심의 자각을 언급한다. 심심의 본각을 거울에 비유하면, 거울은 앞에 있는 대상을 비추는 기능(수연응용)뿐 아니라, 항상 그 너머에 있는 자기를 비추는 기능(자성본용)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정신 활동은 표면적으로 대상을 따라가다 사라지는 산란한 마음(생사의 마음)에 국한되지 않고, 항상 더 깊은 곳에서 깨어 있는 마음이다. 아뢰야식은 이러한 공각의 마음, 본각의 마음이다. 마음을 육식(六識)을 넘어선 깊은 마음, 즉 공각(公覺)의 마음, 본각(本覺)의 마음, 본각의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마음은 단순한 정보 처리 시스템인 컴퓨터나 로봇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음이 마음인 이유는 단순히 축적된 정보의 집합체, 축적된 정보를 처리하는 체계, 또는 그 체계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아니다. 마음은 주어진 정보를 인식하는 자각(自覺)과 더 나아가 그러한 자각을 인식하는 자각(自覺)을 가지고 있는 반면, 입력된 정보나 정보 처리 체계는 그러한 자각 없이 작동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유식[비지냐나(Vijñāna)]은  현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인 정보나 죽은 물질이 아니라, 성스러움으로 깨어난 마음, 자신을 영적으로 자각하는 마음, 그리고 각 개인의 깊은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깨어난 이 깊은 마음은 깨달음의 마음, 본각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성, 여래장, 일심이라고 하며, 선불교에서는 진심, 본심, 본래면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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