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8. 17:59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1) 감성의 꽃이 만발하다

 십우도의 마지막 열 번째의 제목은 '入廓垂手'라고도 하고 입전수수立廛垂手라고도 전해진다. 입곽入廓이나 입전入廛의 일반적인 해석은 '저잣거리에 들어가다'가 된다. 저잣거리로 돌아간다는 말이 가장 근본적인 뜻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수수垂手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해석을 보면 '남에게 가르침의 손길을 드리우다'로 해석된다. 즉 자신만의 수행에 전념하던 것을 그치고 가르침의 손길을 다른 이들에게 내민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중생'이 밖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말하는지, 아니면 자기 내면의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조상들의 흔적인, 유전적 존재들을 말하는지가 될 것이다. 

 만일 중생이 외부에 있는 존재들이고, 십우도의 마지막 장면이 타인에게 봉사하고 타인을 구제하기 위한 삶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열 번째에서 모든 깨달음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불교가 말하는 후득지의 세계는 허구가 된다. 그러나 '중생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집단무의식이 되고, 그것을 의식화해야만 하는 과정이 요구'된다면 후득지는 실재가 된다. 

 

 만일 '자신만의 수행에 전념하던 것을 그치고 가르침의 손길을 다른 이들에게 내민다'로 해석되는 수수垂手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해석해 본다면 어떨까? 즉 자신만의 수행을 할 때는 오직 깨달음이라는 욕망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상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이러한 경우라면 수수垂手는 깨달음이라는 욕망에 의해서 버려두었던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손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게 있다. 

 

 버려진 자기 자신에 대한 눈뜸이 바로 깨어 있음이고, 깨어 있음이야말로 진정한 감성이다. 그러므로 수수垂手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자신을 진정으로 보듬어주고 수용하는 따뜻한 감성의 손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아의 두꺼운 껍질 아래서 잠들어 있던 온몸의 감성 세포가 따스한 봄날에 만개한 꽃처럼 일제히 피어오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수심요론』에서 들어보자. 

 "경전에서 말하기를, 중생은 마음을 앎으로써 스스로 제도한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의식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억겁의 무명을 밝히는 일이고, 분리된 정신의 통합이며, 한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은 라면처럼 기계에 의해서 찍어낼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조상을 거쳐서 진화되어 오늘의 존재에 이르렀다. 한 존재의 내부에는 무수한 조상인 중생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기 내면의 중생들이 스스로 제도해야 하는 중요한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제도하는 일은 언제나 경계를 만들고, 그것에 묶여 있는 자아의 상대의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경계에 묶여 있음을 스스로 떨쳐버리는' 무아의식이 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제 10 송 : 입전수수入廛垂手


露胸跣足入廛來  (노흉선족입전래)
抹土塗灰笑滿腮  (말토도회소만시)
不用神仙眞秘訣  (불용신선진비결)
直敎枯木放花開  (직교고목방화개)

맨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검정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윈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나무 위에 꽃을 피우게 하누나.
 <십우도>

 

 자아는 참으로 연약하고 예민하다. 그러므로 자아는 너무도 쉽게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자아는 늘 자신이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야만 한다. 안으로 무의식이라는 엄청난 힘에 대적해야 하고, 밖으로는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과 호랑이 입모다 더 무섭다는 삶의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치명적인 상처나 죽음으로부터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갑옷과 같은 보호 장치를 필수적으로 원하게 된다. 전지전능한 신의 구원⦁완전함에의 열망⦁집단의식⦁이데올로기⦁출세⦁물질과 사람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로 마음의 갑옷을 입는다. 특정한 갑옷으로 무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적 불안감을 망각하게 해주는 다양한 중독에 빠져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는 자아의 마음은 언제나 현재를 떠나 미래로가 있다. 언젠가는 나의 욕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판타지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본성으로 돌아와 자신을 보니 자아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파악된다(如如). 모든 길은 바로 도道다. 도는 우주의 근본 원리다. 자아는 도라는 것에 온갖 판타지를 덕지덕지 붙여놓았다. 알고 보니 그 모든 것은 실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마음의 방어막들이었다. 그 방어막들을 떨쳐버리니 마음은 너무도 홀가분하다. 

 

전남 순천 송광사 십우도

 

 더 이상 인위적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꾸민다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는 불안과 고통만이 존재할 뿐 즐거움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대면한다면 본성은 지혜의 샘물이 된다. 지혜의 샘물을 마시는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으니 저절로 함박웃음이 가득해진다. 

 

 자연은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 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일어난다. 외부에서 빌려오는 지혜는 남의 것이고 그것은 그만큼의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고유성은 동일한 패턴을 성립시키지 않는다. 선험적 지혜란 바로 고유성에서 나온다. 선험적 지혜는 스스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인위적 주체인 자아의 상대의식은 더 이상 주인이 될 수 없다. 

 

  不用神仙眞秘訣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直敎枯木放花開 당장에 마른나무 위에 꽃을 피우게 하누나!

 

 나무는 '정신적 에너지(Psychische Energie)'로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상징과 리비도>

 

자아의 상대의식으로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무의식과의 단절이다. 무의식과의 단절은 정신의 수원水源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정서는 정신의 뿌리인 무의식에서 온다. 무의식을 부정하는 이성적인 사람이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아의식의 출현은 생명수를 막고 있는 자아를 초월하게 하기 때문에 죽어 있던 감성세포를 되살리는 일이다. 닫혀 있던 감성의 봉우리가 한꺼번에 열리면서 감성의 꽃은 만개한다. 그것은 신선의 비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아의 두꺼운 껍질이 떨어져 나갈 때 피어나는 정신의 꽃이다. 

 

 또한 무아의식의 출현은 임제가 말하는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되는 일이다. '나'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이다. 무아의식에는 '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이제 모든 일은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인식되고 저절로 이해된다. 자아의식이 더 이상 인식의 중심에 있지 않고, 무아의 객체로서 관조될 뿐이다. 

 

 대덕大德들이여! 나는 그대들이 경전과 교리의 해설서(論)에 대해서 정통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그대들의 국왕, 대신이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이 급한 물이 흐르는 듯한 유창한 달변을 가졌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들의 총명한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들이 진정한 견해가 투탈자재透脫自在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설사 백 권의 경과 율을 잘 해설할 수 있다 하여도 꾸밈없는 현재를 사는 한 사람의 삶이 더욱 위대한 것이다. 그대들이 좀 아는 것이 있으면 바로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겨서 지식을 과시하여 승부를 다투는 아수라阿修羅가 된다. 

 선성비구善星比丘는 십이분교를 다 이해했지만 지옥에 산 채로 떨어져 대지大地도 용납하지 않았다. 꾸밈없는 현재를 자유롭게 사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잠을 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지만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안다"
는 옛사람의 노래도 있는 것이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문자 속에서 정신의 자유를 구하지 말라. 지식을 갈구하는 마음이 동요하면 피로하게 되고 찬 기운만 마셔서 이익됨이 없다.

 한 생각의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법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깨달아서 삼승三乘의 방편설을 배우는 보살의 지위마저 벗어나는 것이 으뜸이다.   <임제록>

 

 임제의 설법은 언제나 통렬하다. 투탈자재透脫自在는 임제선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부처도 조사도 그 어떤 위대한 존재에게도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를 만나, 부처를 믿는다면 그는 부처에게 종속된다. 종속된다는 것은 자기의 고유 세계를 잃는다는 것이다. 고유성이 아니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깨달음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부처에게 귀의하거나 조사를 믿는다는 것은 깨달음의 길에서 완전히 어긋난다. 자신을 구원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전지전능한 신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위대한 부처도, 예수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토록 위대한 존재나 전지전능한 신에게 자신을 의존하고 싶어 할까? 그것이 바로 연약한 자아의식이 스스로 자신을 정신의 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기 내면에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모순투성이의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아는 깨달음에 이른 부처와 조사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게 되는 것이다. 

 

 투탈자재透脫自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는 일에 부처나 조사에 의해서 구속拘束되어서도, 방해妨害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다. 이것은 임제가 자아의 특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고유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로서는 끊임없이 외부에 있는 위대한 인물을 찾아서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방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그러므로 모방은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버리는 일이다. 모든 존재는 천상천사 유아독존이다. 즉 우주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투탈자재는 그 누구를 모방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말고, 스스로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경전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깨달음의 방법을 찾아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자부심은 서로 승부를 다투는 아수라의 세계를 살게 만든다고 임제는 말한다. 자아의 분별심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라는 것은 좁은 틀이다. 틀은 꾸며진 삶을 요구한다. 임제에 의하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의 삶이란 꾸밈없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잠을 잔다'는 말은 지극히 단순한 일상이지만, 이것만큼 진리를 대변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정직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도는 일상을 벗어나 있지 않다. 즉 밥 먹고 잠자는 '나'를 떠나서 그 어디에서 도를 찾는다는 것인가? '나'는 부처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자아는 '나'에게 담겨 있는 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아가 인식하는 자기 자신은 거룩한 부처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아 스스로 부처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고 그것을 찾아 세상을 헤매는 이유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마지막은 임제가 말하는 투탈자재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일까? 십우도의 마지막에는 부처가 무엇이라고 묘사될 수 있을까? 만일 부처가 존재라면 부처는 부처를 만난 사람에 의해서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찰 중앙에 모셔져 있는 불상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시조인 석가모니 붓다에게서도, 깨달음의 스승들인 조사에게서도, 심지어 융에게서도 존재로서의 부처는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입장에서는 제시할 수 있는 목표와 의도가 있다. 그러나 자기(Selbst)에 대한 입장은 제시할 수 있는 어떤 목표도, 어떠한 명백한 의도도 지니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어둠에 싸여 있다. 나는 '자기'를 의식적 정신과 무의식적 정신의 전체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체성은 조망할 수 없다. 그것은 실제적인 '보이지 않는 돌'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이 존재하는 한 자기는 진술될 수 없다. 그리고 실존적으로 단순한 명제에 지나지 않아 그것이 지니고 있을 만한 내용은 전혀 표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성이 오직 부분적으로만 경험되는 한 그 부분들은 바로 의식의 내용이다. 그러나 전체성으로서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의식을 초월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부처가 존재의 모습으로 상상되는 것은 원형에 있는 수많은 상像들의 영향이다. 그것에 의해서 거룩함과 비속함으로 나누는 자아의 상대의식은 판타자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자신을 이상화하고 싶은 자아의 꿈이 부처와 같은 이상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의식에 의해서다. 그런데 자기(Self) 혹은 부처는 의식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부처를 표현하거나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것을 융은 

 '자기는 대극과의 갈등 속에서 표명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라고 말하고, 황벽은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부처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부처는 자아가 있음으로써 알 수 있는 정신의 기능인 것이다. 

 

 대답 : "지금 실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너의 마음인 것이다. 만약 말을 하지 않으면 작용도 하지 않는다. 마음의 본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위치나 방향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가 말하기를, 

 '사람의 진성은 깊은 마음의 바닥에 숨겨져 있어서 머리도 없거니와 꼬리도 없다. 그러나 연緣에 대응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편의상 그것을 지혜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연緣에 대응하여 나타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있다고도 없다고도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호응하여 나타나고 있을 그때에도 그것을 보이는 자취는 없다. 

 자기의 마음이 이와 같은 줄을 안 이상 지금 다만 '없는' 그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곧 모든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곳 없이 더구나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했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깊은 마음을 바닥에 숨겨져 있는 진성眞性은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자취를 묘사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연緣에 대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라고 황벽은 설명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그것이 '의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아의식은 자아가 작용할 때 그것을 관조하는 기능이다. 그 관조에 의해서 자아와 그것의 본질인 무의식이 밝혀진다. 자아는 의식되지 않는 한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부처란 외부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아를 관조하는 정신적 기능이다. 

 

 모든 지혜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함에서 온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을 황벽은 '연緣에 대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연이란 관계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관계가 없으면 자아도 작용하지 않는다. 자아가 작용하지 않으면 '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이후에 저잣거리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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