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8. 19:42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2) 저잣거리는 현실세계이자 동시에 무의식의 세계다

 저잣거리는 가장 번잡한 삶의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현대로 말한다면 저잣거리는 도시의 번화가다. 견성한 이후에 왜 저잣거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무아의식이 출현하는 목적이 바로 자아에 대한 관조에 있기 때문이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작용한다. 즉 자아는 상대의식이다. 

 

 상대의식이란 '나'를 중심으로 대상이 만들어진다. 자아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있음으로써 움직인다. '나'는 번잡한 삶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자극을 받고,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며, 그것에 의해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저잣거리는 후득지를 위한 가장 적합한 현실적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십우도의 저잣거리는 융이 말하는 도시의 상징성과 유비될 수 있다. 물과 나무와 마찬가지로 도시는 어머니의 상像안에 있는 고정된 리비도로서 무의식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맨 처음 체험한 외부세계였고, 동시에 내면세계이기도 했다: 내면세계에서는 하나의 상이 나타났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외부에 있는 어머니 상의 반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오래되고 근원적이며 영원한 어머니 상으로, 코레 Kore로, 즉 영원히 젊어진 형상으로 변환한 것이다. 이것이 곧 집단적 무의식을 의인화한 아니마이다. ⦁⦁⦁⦁⦁⦁ 어머니와 자식의 재결합을 주체와 객체의 합류合流라는 명백한 상징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정신은 자신의 근원적 상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근원적 상은 정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상은 주체와 객체의 합류를 나타내는 상징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융은 도시가 모성이자 여인의 상징이란 것을 성경과 고대 이집트신화를 비롯해 인도와 유럽의 표상, 중국의 풍습들에서도 찾아내고 있다. 

 

 끊임없는 교접交接의 주제는 또한 인도의 수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링감  Linggam  상징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기초가 되는 밑바닥은 여성을 상징하고, 그 가운데에 돌출된 것은 남근이다. 이 상징은 그리스의 남근 바구니, 또는 남근 상자와 유사하다. 상자나 궤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머니의 자궁인데, 이미 고대의 신화학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다.

귀중한 내용물을 담는 상자, 그릇, 바구니 등은 종종 물 위에 떠도는 것으로 여겨졌고, 또한 이것은 태양의 운행과 유비되었다. 왜냐하면 태양은 저녁마다 어머니의 바다로 침수하였다가 아침이면 다시 새롭게 탄생하는 불멸의 신으로, 바다 위를 헤엄쳐 가기 때문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브라흐마와 비슈누
힌두교의 시바신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 Brahma와 유지의 신 비슈누 Vishnu와 파괴의 신 시바 Shiva가 있다. 시바는 불교에 수용되어 '대자재천大自在天'으로 불린다. 시바는 수미산에서 황소를 타고 다닌다. 황소가 생산에너지, 생명에너지를 의미하는 리비도라는 사실을 여기서 또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시바는 본래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양성체이다. 시바 몸의 절반을 아내에게 주었다는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 끊임없는 교접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속성이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동양의 고대사상과 중세철학의 일반적 흐름이다. 융은 의식을 남성성이라고 보았고 무의식을 여성성이라고 보았다. 정신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 중에서 더 발달된 성에 의해서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남자로 태어난 사람의 내면에는 여성적 성질이 열등기능으로 남아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남성적 기능이 열등기능으로 남아 있다. 이 두 기능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적으로 발전할 때 건강한 정신이 될 수 있다. 시바가 상징하고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의 끊임없는 교접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건강한 교류다.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사고思考라면 여성성인 아니마는 감정이다. 여성은 감정적 측면이 강하게 발달하면서 사고적 측면이 무의식으로 남게 되고, 남성은 이성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감정적 측면이 무의식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의식이 드러나면 자아의식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던 내면의 열등한 기능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에게는 내면의 열등기능으로 있는 남성성, 즉 아니무스가 드러나고, 남성에게는 열등기능으로 남아 있던 여성성인 아니마가 드러난다. 

 

 여인은 무의식이다. 저잣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미분화되어 있던 본성을 분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것은 자궁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그리움이다. 그것은 태양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자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재탄생을 의미한다. 재탄생은 자아의식의 좁은 관념을 초월하는 무아의식이라는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상징은 금기와 맞닥뜨린다.

알렉스 그레이(Alex Grey&amp;#44; 1953~ )작품 &amp;#39;Ocean of Love Bliss&amp;#39;알렉스 그레이(Alex Grey&amp;#44; 1953~ ) 작품 &amp;#39;Promise&amp;#39;

 '근친상간의' 욕구가 성교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이가 되려는, 즉 부모의 보호막으로 되돌아가려는 그런 독특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근친상간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방법 중 하나는 어머니를 수태시켜 자기 자신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방해하며 끼어드는 것이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이런 이유로 이제는 태양신화들, 혹은 재생신화들이 새삼스럽게 어머니에 관한 모든 연결 가능한 유비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리비도를 새로운 형태들로 흘러가게 되고, 그로써 리비도가 어떤 실제적인 근친상간으로 퇴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려고 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는 예를 들면 어머니를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거나 젊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는 출산 후 다시 사라지며 그녀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찾고 있는 것은 근친상간적 동침이 아니라 재탄생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장애물은 독창적인 환상을 만들어낸다 : 예를 들어 수태의 마술로써 어머니를 임신시킨다. 근친상간 금지의 성공과 이행 시도는 결국 환상연습이 된다. 환상 연습은 점차 가능성들을 창조하면서 리비도가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게 된다. 

 이로써 리비도는 어느새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영적인 형태로 인도된다. '항상 악을 원하는' 힘이 영적 삶을 창조한다. 그 때문에 종교에서는 이런 노정路程이 체계화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부모의 보호막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는 당대唐代의 승려 향엄지한香嚴智閑이 스승 위산으로부터 받은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라는 화두와 유비된다. 어느 날 위산이 제자 지향에게 말했다. 

 

 "그대가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에 의지하지 않고서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나오기 이전 말이네. 아무것도 모르고 분별하지도 못하던 때의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 보게나."

 

 지한은 스승에게 여러 가지 대답을 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그 뜻을 알고 싶은 지한이 스승 위산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위산이 대답하기를

 "나의 말은 그저 나의 견해일 뿐 그대의 안목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라고 했다. 

 

 즉 이 말은, 자기 자신의 본성은 자기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타인이 언급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생의 목적이다. 오직 하나뿐인 자기의 본성을 아는 것이 바로 무아의식이고, 무아의식이 드러남이 곧 재생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해지는 '근친상간' 욕구의 근본적인 의미는 본래의 자리, 본성의 한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다. 재탄생은 불교의 견성에 해당한다. 견성은 자아의식이 절대의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견성은 자아의 삶이 아니라 자기(Self)인 부처의 삶이다. 즉 부처가 부처 자신을 관조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환상연습은 그것이 현실이 아닌 상징적 의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상징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물질적인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것은 정신의 감관작용을 흐리게 하여 정신적 고양을 가져올 수가 없게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와의 결합이라는 상징을 현실로 잘못 해석하면 그것은 금지영역이 된다. 이것이 바로 금지영역에 담겨 있는 '여인'에 대한 상징을 '도시'로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다.  

 

 상징을 형성하는 과정이 어머니 대신 그 자리에 도시, 샘, 동굴, 교회 등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대치는 리비도의 퇴보가 어린 시절의 수단과 방법, 무엇보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아이에게는 한때 자연스럽고 유용하던 것이지만 성인에게는 근친상간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심적인 위험을 의미한다.

 그런데 근친상간의 금기가 그러한 리비도의 흐름을 저지하여 리비도의 퇴행적인 방식을 제지한다. 그래서 리비도는 무의식에 의해 생산된 어머니의 유비들로 이행移行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리비도는 다시 진지하게 되고 심지어는 이전보다 더 고양된 의식의 단계로 발전된다. 

 이와 같은 이행의 합목적성은 어머니의 자리에 도시가 등장할 경우 특히 분명해진다 : 어머니에 대한 갓난아기의 유착은(1차적이든 부차적이든) 성인의 제약이자 마비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도시에 결합된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덕목을 촉진하고 적어도 도시에 유용한 존재가 되도록 한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모든 상징들은 무의식의 언어들이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한 밖으로 투사된다. 그러므로 상징이 상징으로써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이 아니라면, 상징이 현실적 사실로 투사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상징이 심적인 위험을 내포하는 한 리비도는 본래의 목적대로 흘러갈 수 없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맞대어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상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알렉스 그레이(Alex Grey, 1953~ ) 작품
'Newborn'

 물의 상징은 우리가 오기게스를 언급할 때 도시와 연관 지은 바 있다. 물이 지니고 있는 모성적 의미는 신화의 영역에서 가장 분명한 상징에 해당한다. ⦁⦁⦁⦁⦁⦁ 물에서 생명이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는 두 신이 그리스도와 미트라스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트라스는 강가에서 태어났고, 그리스도는 요단강에서 '재탄생'을 경험하였다. 

 그는 '샘, 즉 사랑의 영원한 샘', 즉 신의 어머니에서 태어났다. 이교적-기독교 전설에서는 신의 어머니를 샘의 요정으로 만들고 있다.  

 

 도시는 곧 물이다. 물은 이미 앞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이다. 모든 신화적 영웅들은 물과 관련을 갖는다. 왜냐하면 물은 창조의 신이자 창조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저잣거리는 도시이자 도시에 물이다. 그러므로 십우도에서 다시 저잣거리로 나온다는 것은 재탄생을 위한 순환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머니-이마고를 물에 투사하면 물에 누미노제나 마술적 특질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어머니에 합당하다. 그 좋은 예가 교회에 있는 세례용 성수의 상징이다. 꿈과 환상에서 바다나 큰 물은 무의식을 의미한다. 물의 모성적 측면은 무의식의 성질과 일치한다. 물이 (특히 남성인 경우에) 의식의 모체 혹은 모상母床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도-주관단계로 해석한다면-물처럼 모성적 의미를 지닌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어머니의 상을 물에 투사한다는 것은 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성은 무의식에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의식의 의식화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일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이다. 통합된 정신, 즉 한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리된 마음과는 전혀 다른 정신이다. 

 

 그것을 새로운 인격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견성 이후의 삶은 자아의 조각난 인격이 아니라 무아의 온전한 인격에 의해서 진행된다. 온전한 인격이란 자기 삶의 모든 순간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소비하고 소유하는 편협한 병적 삶의 존재방식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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