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9. 18:37

10. 입곽수수 :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3) 중생은 바로 자아이면서 무의식이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의 정신을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명상을 하는 많은 이들이 '청정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 일어나는 생각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혜능은 그러한 관념적 깨달음에 대한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자기 스스로의 의식에서, 언제나 모든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그 대상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만약 아무런 사물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죄다 떨쳐버린다면, 그 사람은 최후의 의식이 끊어질 때는 그대로 죽었다가, 다른 세상에 새로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는 깊이 생각하여, 가르침의 참뜻(法意)을 알아차라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래서 나는 무념無念으로써 종지를 삼는다. 

 여러분 어째서 무념으로써 종지를 삼을까? 그것은 다만 입으로만 견성見性을 해설하더라도, 본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바깥 대상에 대하여 의식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의식으로써 곧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번뇌와 망상이 거기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기 본성은 본디부터 '이것이다'라고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무無란 것은 주관⦁객관의 대립이 없다는 것이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번뇌의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염念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眞如)의 본성을 생각함을(꿰뚫어 봄)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란 것은 곧 염의 본체이며, 염은 곧 있는 그대로(진여)의 작용이다. ⦁⦁⦁⦁⦁⦁

 여러분, 있는 그대로의 자성이 염을 일으키기 때문에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각기관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見聞覺知) 하는 작용이 가능하면서도 온갖 대상에 더럽히지 않을뿐더러⦁⦁⦁⦁⦁⦁밖으로는 대상에 대하여 분명히 여러 가지 물체 모습을 인식하면서도, 안으로는 궁극진리에 뿌리 박혀 요지부동이다. 
 <육조단경>

 

  깨달음이란 대상을 보지만 대상에 매이지 않고, 생각을 하지만 생각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즉 자아의 상대의식은 자신과 대상을 둘로 나눔으로써 그것에 얽매이고 고통받는다. 그러한 자아의식을 관조하는 것이 무아의식이다. 무아의식은 자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고요함이나 청정함이 아니다. 자아의 사사로움에 물들지 않는다면 의식은 그 자체로서 청정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것을 무아의식이라고 말하고, 융은 무아의식을 자아의 상대의식과 구분하여 절대의식이라고 말한다. 청정한 의식은 정신의 가장 위대한 정신기능이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혜능은 사람이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떨쳐낸다면, 죽을 때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윤회할 뿐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생각과 사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다만 그 생각과 사고의 주체가 자아일 때 객관적 진실이나 진정한 지혜를 기대할 수 없다. 융 또한 숙고熟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신처럼 무지개다리 위를 걸어갈 수 없다. 그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숙고라는 수단을 가지고 그 아래를 통과해야 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불교에서 생각을 막는 것은 초기 집중수행 과정이다. 우선적으로 시급한 것은 자아의 구조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생각에 빼앗기지 않고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대극으로 인식하여 억압하거나 저항하려고 할 때 의식의 에너지는 급격하게 소모된다. 의식의 에너지가 집중되어야 자아의 구조가 강해진다. 

 

 그러므로 집중수행을 통해서 생각을 없애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 의해서 자아의 구조가 확고하게 구축되면 자아의 초월이 가능해진다. 일어나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은 오직 자아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초기 단계에서만 필요하다. 그 후에도 계속 생각을 없앤다면 그의 정신적 성장은 멈추어버린다. 정신적 성장은 숙고의 결과다. 진정한 숙고는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자아의 사사로운 생각과 분별은 집착의 원인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집착은 철저한 주관성이다. 주관성에는 진리가 없다. 

 

 모든 진리는 진정한 객관성에서 온다. 무아가 나타나면 자아는 무아의 법칙에 순종하여 자신의 의지를 희생한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즉 깨달음 이후에 자아는 더 이상 정신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 관조된다. 

 자아의 상대의식으로 본다면 십우도의 가장 마지막에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아의식에게 있어서의 깨달음이란 무아의식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아의식의 출현은 자아의 의지와 노력과 희생의 결과다. 그러므로 무아의식이 정신의 주체적 기능으로 돌아올 때, 깨달음을 향한 모든 인위적 노력이 멈추게 된다. 

 

 이것을 자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임제가 말하는 '일없는 사람(無事人)'이다. 무아의식이 출현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자아의식의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중지되기 때문이다. 무아의식에는 깨달음이니 깨닫지 않음이니 하는 이원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뿐이다. 자아는 곧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무아의식이 자아를 봄으로써 무의식의 의식화는 일어난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자기 이해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 혹은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바로 순환이다.

순환의 과정에서 보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결정요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시간과 공간은 자아가 의식을 성장시키고 그 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육체가 없을 것이고, 육체가 없다면 자아의 작용도 없고, 자아의 작용이 없다면 무아가 인식할 것도 없다. 이것은 깨달음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무아의식의 출현은 정신의 중앙으로의 완전한 집중에서 온다. 완전한 집중이 일어나면 순환의 과정으로 다시 세상에 돌아와야 한다. 다시 돌아온 세상은 깨달음을 위해 떠났던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이미 인식의 주체가 자아에서 무아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정지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현실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현실이야말로 평상심이 가동되는 곳이다. 평상심은 인위적 조건에 의해서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즉 자아의 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자아의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날 때 무아의 자아에 대한 명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덟 번째에서 소도 나도 없는 단일체인 한마음을 경험하고, 아홉 번째에서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원성이 사라진 상태다. 그러므로 열 번째는 스스로 자신이 만들고 있던 경계가 무엇인지를 보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의 모든 움직임은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돌아오는 세상은 자아에 연결되어 있는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의식화하게 되는 과정이다. 

술병을 들고 저잣거리에 서있는 스님

 

 열 번째 그림에서 스님이 술병을 들고 저잣거리에 서 있다. 현실적 존재로 되돌아오는 것에 자아는 언제나 두려움을 느낀다. 자아의 상대의식으로 본다면 그러한 그림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술병을 든 그림을 보고 그 상징성을 잘못 이해할까 우려한 사람들이 술병을 없애고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림으로 바꾸어버린다. 술병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거룩한 관념적 부처님의 세계와는 반대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환의 과정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경계에 묶여 있는 삶은 자아의 상대의식이 주체가 된 삶이다. 그러나 공空인 무아의식이 주체가 된 삶에는 더 이상 경계가 없다. 경계 안에 있을 때는 경계 밖의 세상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인위적 삶이지 본연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아가 주체인 삶은 자아가 구분하고 경계에 빠져 헤매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것이 바로 본연의 삶이 무엇인지 눈뜨게 되는 과정이다. 

 

 모든 경계는 자아의식이 만들어낸 무의식에 대한 방어체계다. 그것은 광대한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자아의 두려운 마음을 잠시 합리화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반면에 바다에 있는 수많은 고귀한 보물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제 정신의 주인은 무아의식이다. 무의식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아의식은 바다에 있는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하나씩 꺼내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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