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아의식은 '나'를 해방시키는 길이다
교접은 바로 탄생과 연결된다.
"해를 삼켰다가 다시 출산하는 바다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의식이 생기는 순간, 즉 주체와 객체가 갈라지는 순간은 하나의 탄생이다." <영웅과 어머니의 원형>
즉 첫 번째 탄생은 자아의식의 탄생이다. 자아의식의 탄생은 무의식의 희생에 의해서 가능하다. 두 번째 탄생은 무아의식의 탄생이다. 무아의식의 탄생은 자아의 희생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무아의식의 탄생은 성불成佛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분석심리학의 개성화다. 그것은 분리된 마음이 한마음(一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십우도의 과정은 무아의식의 출현을 위한 정신의 중앙 집중 과정이다. 무아의식은 정신이 중앙에 완전하게 집중되었을 때 작동된다. 그러므로 십우도는 무아의식의 출현을 위한 과정이고, 후득지는 무아의식이 기능하는 관조觀照 과정이다. 무아의식의 관조에 의해서 자아와 자아의 뿌리인 집단무의식의 본질은 드러난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고, 한마음으로의 진정한 통합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아를 명상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감정과 욕구들은 본능이다. 자아는 본능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안다는 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자아에 대한 이해는 바로 본성에 대한 이해다.
자아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학습되고 인식되는 틀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의 구조와 특성이 자아를 초월하여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방해한다. 융은 『티벳 사자의 서』 서문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밀쳐대고 억누르는 수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지 궁금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사자는 바로 이 '주어진' 것들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하며⦁⦁⦁⦁⦁⦁."
자아의식의 관심은 오직 표피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표피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한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는 상실된다. 그러나 무아의식은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후득지에서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주어진 것'들을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해방된다는 것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앎으로써 일어난다. 우리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도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창조해 내었고, 모든 것을 결정해 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나'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이 바로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아는 것이 '나'라는 생각에 의해서 묶여 있는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다. 융은 초월이란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이라고 말한다. 즉 사고와 관점은 '나'라는 자아가 만들어내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때 가능하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이자 자아의 초월이다.
고苦와 허무, 무상이나 무아는 모두 자아의 상대의식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아의 절대의식에서는 그러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과 무아를 느끼는 것은 자아다. 대극의 쌍은 불교의 기본원리다. 대극의 쌍이 드러나는 것은 대극을 나누는 자아의식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깨달음 또한 자아의식이 대극현상으로 스스로 고통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사들이 자아가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후득지는 자아희생의 길이다. 무의식의 희생 없이 자아의식의 성장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자아의 희생 없이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는 정신의 보물들을 건져 올릴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대극에 의해서만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견성을 한다고 해서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자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 자리에서 물러날 뿐이다. 자아의 기능이 작용해야만 무의식이 작용할 수 있고, 그것을 무아가 명상할 수 있다. 그것은 부처가 중생을 명상하는 일이고, 부처가 부처를 명상하는 일이고, 부처가 중생을 구하는 일이다.
무아의식의 관조는 억압과 억제의 방어기제에 묶여 있는 모든 정신적 요소들의 작용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통합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즉석에서 깨달았고 무소유의 정신을 달성했고, 그 후부터는 무슨 결과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디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간과 문화>
이것은 무아의식이 금강석과 같은 정신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아의 절대의식이 금강석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외부적⦁내부적 자극에도 동일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관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아의식은 모든 자극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쉽게 자극받고 흔들리고 상처받고 지친다. 그러므로 자아로서 자아를 관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크고 한계가 분명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깨달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단무의식 혹은 아뢰야식은 자아를 통해서 의식의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있고, 외부적 세상과 내부적 세상 또한 자아에 의해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여러 용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점오漸悟와 돈오頓悟가 있다. 말 그대로 점오는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고, 돈오는 일시에 깨닫는다는 것이다. 점오는 자아의 관점이고 돈오는 무아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무아의식의 출현으로 본다면 돈오가 더 적합할 것이다.
자아의식도 매 순간 작은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이것은 자아의 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수행에 속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아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이 드러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진정한 깨달음은 돈오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그런데 돈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구분되기도 한다. 고려시대 불교는 선종과 교종이라는 극단적 대립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대립에 화해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바로 승려 지눌이다. 지눌은 돈오점수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수행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야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다. 깨달음이란 무아의식의 출현이다.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만 마음이 진정으로 관조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아의식의 수행이란 자아구조의 강화과정이다. 자아의 상대의식으로서는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의식에 의해서만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관찰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지눌의 주장은 옳다.
한편으로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알려진 승려 성철性哲이 돈오점수에 반박하며 돈오돈수를 주장하게 된다. 돈오돈수란 단밖에 깨치고 수행 또한 단박에 행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무아의식이 출현함으로 일어나는 후득지는 모두 무아의식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것을 조사 임제의 말로 하자면 '일없는 사람(無事人)'이다. 후득지는 인식주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수행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향한 자아의 인위적 노력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오돈수가 더 적합하다. 그러나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는 모두 관점을 달리할 뿐 그 의미는 같다. 결국 지눌이 돈오점수라고 한 것은 깨달음을 순환의 과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돈오 이후에는 비록 자아의 인위적인 노력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지만, 무아의식에 의해서 정신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깨달음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