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온전성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경험이다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개체는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유성에 대한 융의 설명은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진화과정이 빚어낸 놀라운 걸작'이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부처로 살 것인지 중생으로 살 것인지는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다. 구제해야만 되는 중생은 밖에 있는 대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이다. 지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인의 『수심요론』에서는
"중생은 마음을 바로 앎으로써 스스로 구제한다.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지 못한다"
<육조단경>
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마음을 바로 아는 일, 정확하게 아는 일은 오직 무아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근원적인 마음(original mind)'이 심각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과 상징>
라는 융의 말을 통해서도 후득지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해 준다. 견성을 한 후 다시 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에 무아의식의 관조가 일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나약한 자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이러한 자아의 마음이 '지금, 여기'를 회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자아는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이나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살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 불안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자아의 판타지는 불안한 자신을 보지 않으려는 필연적인 자기 방어기제다.
판타지 속에 사는 자아로서는 실재를 볼 수 없다. 실재를 보는 것은 오직 무아의식뿐이다. 소를 만나기 이전에는 소와 사람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즉 의식과 무의식, 감정과 사고는 정반대로 대립되어 있었다. 대립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나 가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즉 본성을 대극으로 두고 있는 자아의식이 본성의 정동적 가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립된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통합은 활발한 소통이다. 그러므로 본성에 있는 정동적 가치는 상실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정동(emotion)은 신체적 사건과 삶을 연결시키는 정신의 중요한 요소다. 그것을 상실하고 산다는 것은 죽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후득지는 저잣거리로 나가서 정동적 요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명상한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남아 있던 정신적 내용들을 의식화하는 것이고, 고유성을 실현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은 다르기는 하나 그 선악을 일으키는 본성에는 대립이 없다. 이 대립이 없는 본성을 일컬어 실성實性이라 한다. 이 실성 가운데 있으면서 선악에 물들지 않는 것, 이를 복덕원만의 보신불이라 일컫는다."
<육조단경>
실성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고 해석된다. 십우도에서 마지막 저잣거리로 나가는 것은 선과 악의 대립이 없는 상태, 즉 실성實性이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악을 경험하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경지가 된다. 자기 근원의 비밀이 하나씩 열리니 그것을 즐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지를 보신불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보신불은 수용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체득하고 수용하여 깨달음을 얻기(자내증自內證) 때문이다.
즉 복덕원만의 보신불 상태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과정이다. 보신불 상태에서는 자신의 실성을 그대로 경험하여 있는 그대로 인식하므로 본성이 전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과정에 의해서 개성화가 일어난다.
소를 찾아 나서고 소를 발견하고 소를 타고 길들이고 소와 나가 하나가 되어 소도 없고 나도 없는 결과가 바로 무아의식의 출현이다.
무아의식에 의해서 깊은 어둠으로 있던 중생들은 하나씩 빛의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이후에 일어나는 후득지가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열 번째에서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자아를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다. 자아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정확한 이해란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자아는 왜 절대적 객관성으로 관조되어야만 하는가? 자아가 바로 각 개체의 고유한 인격을 나타내고 있는 자성이자 법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아를 알았을 때 비로소 각 개체의 고유성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제법에는 각자 확정된 자성이 있고 그것에는 어떤 혼란도 없다는 것이다. 제법에 각자 확정된 자성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정해진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르다 그 자신과 그 본질은 항상 한다는 항상성을 드러내고, 다르마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제법의 자성이라는 것은 각각의 고유한 성질로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원리이다. <불교의 언어관>
자성이 '고유한 성질로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원리'라면 그것은 곧 자아다. 무아는 고유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아가 있음으로써 대상이 생긴다. 자아의 구별하는 성질에 의해서 자아는 무화無化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마의 항상성이 바로 자아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융은 왜 자아의 구조가 튼튼해야 하고 그것이 쉽게 변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약 인격의 무의식적 부분이 의식화되면 무의식적 부분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자아 인격에 단지 동화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아 인격에 변화가 일어난다. 큰 어려움은 방식의 변화를 특정 짓는 일이다. 자아는 일반적으로 확고하게 짜 맞추어진 콤플렉스이다. 병적인 장해를 감수하지 않으려면 그것과 연결된 의식과 그 연속성은 쉽게 변화될 수도 없고 변화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아 변화와 가장 가까운 대비對比는 정신병리학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신경증적 해리뿐만 아니라 정신분열증 분해, 심지어 자아의 붕괴까지도 볼 수 있다. •••••• 자아 콤플렉스 구조가 강해서 치명적인 와해를 입지 않고도 무의식적인 내용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면 동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원형과 무의식>
즉 후득지는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이다. 의식화된 무의식의 내용들, 즉 무명으로 있던 정신의 내용들이 밝게 드러나면 그것들은 자아 인격에 동화된다. 즉 자아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의 인격에 변화를 가져온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는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는 지혜롭게 변할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서술되어 왔듯이 '확고하게 짜 맞추어진 콤플렉스'로서 항상성을 유지해야 하는 자아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무의식적 내용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자아도 변화한다. 자아는 비록 자신의 구조를 보존할 수 있지만 중심적이며 지배적인 위치에서 밀려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위치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는 필수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관객이 되어버린다.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는 이유는 의지 자체가 약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생각들이 의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자아는 무의식의 내용이 흘러들어 감으로써 인격이 생기를 얻고 풍부해진다. 범위와 강도 면에서 자아를 넘어서는 형상을 만들어내게 됨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마비시킨다. 또한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자아가 두 번째의 위치로 물러나는 것이 어차피 질 것이 분명한 가망 없는 싸움보다는 더 낫다고 자아를 설득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에너지로서의 차츰 더 강한 요소, 즉 내가 자기(Selbst)라고 표현한 새로운 전체적 형상에 속하게 된다. <원형과 무의식>
무의식이 의식화되면 무의식은 더 이상 무명의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에 무의식의 내용이 수용되면 자아가 변화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무의식을 알지 못했을 때, 자아의식에게 무의식은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나 무의식이 밝게 드러나면 그것은 자신의 원천적 에너지가 된다. 그러므로 인격은 생기를 얻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자아 자신의 결점과 어리석음을 인식해 간다는 것이 자아에게는 고통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것이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의식의 확장은 자신이 무의식의 내용을 인식하는 만큼 커진다. 그러면서 자아 중심적 의지는 꺾이고 자기(Selbst)의 전체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분석심리의 경우와 깨달음의 경우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심리분석은 자아가 초월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시작한다. 분석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초월을 경험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반면에 후득지는 이미 자아가 초월되어 있다.
초월이란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이라고 융은 말한다. <티베트 사자의 서>
자아의식은 부분적 인식이지만 무아의식은 전체적 인식이다. 분석과정을 통해서 자아의식은 점진적으로 사고와 관점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
반면에 후득지에서는 사고와 관점의 전환이 이미 일어난 상태다. 자아는 이미 객관화되어 있는 것이다. 즉 무아의식이 인식의 중심에 있다. 무아의식은 자신의 실성實性을 경험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긴다.
붓다가 왜 '자아만이 자신의 의지처'라고 했는지 여기서 그 뜻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자아가 곧 자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법에는 각자 확정된 자성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곧 각 객체의 고유한 성질을 아는 것이 된다.
자아를 알지 않고서는 '나'의 본질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무의식의 성질들은 결국 자아의 작용에 따라서 일어난다. 황벽의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아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아는 자아를 관조하는 객관화된 의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성은 중생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울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경험은 스스로 해야 한다.
"그림의 떡으로는 배가 부를 수 없다. 사람들에게 음식에 관해서 가르쳐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써 배를 부르게 해 줄 수는 없다." <육조단경>
이 말인즉슨, 무아의식의 출현으로 이제 자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경험하러 가야 한다. 그림으로 보는 떡이 아니라 실제로 떡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 떡 맛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그 속성을 더 확연하게 드러낸다. 저잣거리는 관계를 형성시키는 무대다. 저잣거리에서 자아는 자극을 받아 움직인다. 그리고 자아의 움직임이 일어날 때 무아는 자아를 관조할 수 있다. 그것은 불성이 중생의 본질을 파악하는 본질적인 경험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후득지는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경험한다. 중도中道는 바로 절대적 객관성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야말로 참다운 수행의 길이다. 지눌이 돈오를 한 후에야 참다운 수행이 일어난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견성은 중도를 이해하고 행하게 된다.
이미 성품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자아행위의 모든 것을 명상한다는 의미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의식적이면서 무의식적 전체성을 표현한다고 융은 말한다.
무의식에는 본능의 토대와 밀접하게 연관된 태고의 잔재들과 원시적인 기능이 있음을 심층심리학에서 이미 증명하고 있다. <원형과 무의식>
후득지는 집단무의식이 자아를 통해서 의식화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집단무의식에 어떻게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지를 관조하게 된다. 집단무의식은 인간본연이라는 전체성이다. 그러므로 집단무의식의 대한 관조는 전체성에 대한 이해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며 또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진정한 이타利他는 이러한 이해가 뒷받침되었을 때 일어난다.
본능의 토대는 사람의 심적 소질(Disposition)로서 개체에게 유전되어 삶을 지배한다. 사람은 유전된 심적 소질에 의해서 자유를 고도로 제약받는다. 즉 인간은 본능으로부터 결코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라는 개별적인 인간 의식이 자신이 세상 밖으로 투사한 그림자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자기 책임으로 거두어들이기에는 너무도 나약하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그러나 무아의식의 출현은 더 이상 무의식의 어둠을 두려워하며 그것에 감금되어 있던 나약한 자아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스스로 절대적 객관성으로 비추어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무아의식은 심적 소질(Disposition)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의식화해 낸다. 의식화의 중요성을 융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존재는 어둠과 감금 상태에서 해방되었고, 마침내 부활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그러므로 십우도의 마지막 입전수수入廛垂手에서는 자아의식의 경계에 묶여 있음을 스스로 떨쳐버리고 본연의 삶을 살아간다. 무아의 삶은 더 이상 동물적 본성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다. 어둠으로 남아 있는 무의식을 밝음의 세계로 의식화하고 통합하는 일은 불성이 가진 특권이다. 소와 하나가 된 다음, 소도 없고 나도 없는 무아는 자아를 명상하는 기능이다. 그것은 부처가 부처 자신을 명상하는 일이다.
세상으로 가는 길은 부처가 자아를 진정으로 체험하는 과정이다. 자아가 세상이라는 자극을 만남으로써 그 작용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무아는 그런 자아를 있는 그대로 명상한다. 자아의 뿌리는 아뢰야식이다. 그러므로 자아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집단무의식인 아뢰야식을 명상하는 것이고, 아뢰야식을 명상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명상하는 것이다.
무아는 조금도 과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난다.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남아 있는 집단무의식의 중생들을 하나하나 구제하는 일이다. 그것은 분리된 정신의 진정한 통합이다. 이것이 바로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가 세상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자아가 사는 세상과 무아가 사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대극 사이의 화해'이자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해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진정한 화해는 무의식을 부정하는 자아로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자아를 초월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객관화이다.
무아 중심의 절대적 객관화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체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 중심의 의식의 범주로서는 자연 상태의 있는 그대로의 정신을 수용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성경의 외전外典이 전하는 말을 되새기게 해 준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복되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인간의 상과 신의 상>
이것은 불성이 중생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하는 혜능의 말과 같다.
대사 : "그대들은 잘 듣게나. 후대의 사람들이 만약 중생을 파악한다면, 그것은 불성을 알았다는 것이 된다. 만약 중생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부처님을 찾아도 만나기는 어렵다. 어디 한번 그대들에게 자기 마음의 중생을 파악함으로써 자기 마음의 불성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지.
자,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고 싶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중생을 파악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부처님이 중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본성이 깨어 있다면 그 중생은 바로 부처님이다
자기 본성이 평등•솔직하다는 점에서 중생은 부처님이며, 자기 마음이 비틀려 있으면 부처님도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 마음이 비틀려 있으면 부처님은 중생 속에 파묻혀 버린다. 일념一念의 마음이 평등•솔직하게만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중생이 부처님으로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
불성은 본성을 보는 것에 있어서 마음이 비틀려 있지 않은 일념一念이다. 또한 불성은 옮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 평등함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솔직함이다. 중생이 어리석은 것은 불성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중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가 중생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만이 온전하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진정한 변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지속적으로 개인적 변화가 일어날 때 정신의 집단적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집단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동물성이고 무의식성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식성은 개인성에 있다.
그러므로 후득지는 진정한 의식성이고 진정한 독립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인식, 자기 이해는 견성 이후에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후득지가 구현되어야 하는 필요불가결한 과정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