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 인우구망 : 사람과 소를 모두 버리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7. 23:32

8. 인우구망 : 사람과 소를 모두 버리다

4) 원(空)은 '참된 의식'이 드러남이다

 참된 의식이란 무엇일까? 경전에는 '참된 의식'에 대한 설명을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왜 텅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소도 없고 나도 없으니 빈 것이 맞다. '나'는 소를 보았고, 나는 소를 길들였고, 나는 소를 타고 집으로 왔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소를 찾고자 했던 '의식된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의 '나'가 있었다. 즉 소를 분별하여 찾아내고 소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의식된 의식'을 가진 인간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소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의식된 주체가 있는 한 소와 '나'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분리된 의식은 '참된 의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분리되어 있는 한 통합은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의식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나'라는 의식된 의지를 가진 '나'가 사라진다. 말하자면 자아의식의 완전한 희생이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인식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텅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와 소를 버린 그 자리에 진정한 주인인 '참된 의식'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참된 의식은 무아다. 무아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기준을 책정하고 관념을 만들어내는 '나'를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이나 분별도 없다. 그저 자아와 그것에 연결되어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 관조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식이 절대적 객관성이 되는 이유다. '참된 의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닌 정신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식이란 불교의 법신(다르마카야)이다. 법신은 완전한 깨달음을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닫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의식'은 모든 생각들을 창조해 내는 근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들을 일으키는 것도 근원이고, 일어난 생각들을 관조하는 것도 근원이다. '참된 의식'이란 생각을 관조하는 기능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

 

 '생각이 일어나야만 부처도 일어난다'는 조사 황벽의 말은 여기서 그 해답이 찾아진다. 이것은 결국 자아가 작용해야만 법신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자아를 관조하는 법신 또한 기능할 필요가 없다. 

 참되 의식이라는 말은 거짓된 의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된 의식이란 무엇일까? 거짓된 의식이란 곧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은 페르소나가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실재가 아니라 판타지를 추구한다. 자아의식의 기능은 '나'라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모습을 적절하게 감추고 좋게 위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식으로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참모습은 조금의 인위적 가감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다. 그것은 오직 참된 의식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자아에 의해서 꾸며지고 숨겨진 모습 하나하나를 발견하고 인식하며 이해하는 것이 법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관조해야만 하는 것일까?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그 답을 알려준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알지 않고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선이다. 생각은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조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존재 자체인 것이다. 

 

전남 순천 송광사 십우도

 

 제 8 송 : 망우존인忘牛存人

 

鞭索人牛盡屬空  (편삭인우진속공)

碧天寥廓信難通  (벽천요곽신난통)

紅爐焰上爭容雪  (홍로염상쟁용설)

到此方能合祖宗  (도차방능합조종)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비로소 무아의식이 전면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자아의 상대의식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소와 사람도 있을 리가 없다. 길들일 소도, 소를 길들이는 사람도 없는데 채찍과 고삐가 있을 리가 없다. 무아의식은 절대의식으로서 인식 그 자체이다. 

 

碧天寥廓信難通

                                                         푸른 허공만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자아의 좁은 틀에 갇혀서 볼 수 없었던 정신의 전체성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허공과도 같다. 하늘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지을 수 있는 한정된 것이 아니다. 푸른 허공은 정신의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다.

 

紅爐焰上爭容雪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태양의 상징은 불꽃으로 바뀐다. 불과 해는 모두 하나의 빛이고 가장 강렬한 에너지다. 융은 인간을 모든 생물로부터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언어와 불의 사용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불과 언어가 모두 정신적 에너지(리비도)의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융은 그 근원을 산스크리트어인 '테자스 tejas'에서 찾는다. 

 

 

 ①예리함, 날, 불  ②광채, 빛, 작열, 열기,  ③건강한 모습, 아름다움,  ④인체 내에 있는 색을 만드는 힘  ⑤ 힘, 에너지, 생명력  ⑥ 격정적인 존재  ⑦ 정신적이고 또한 마술적인 힘, 영향력, 명성, 품위  ⑧ 남성의 정자.
 그러므로 테자스 tejas라는 단어는 '리비도'라는 표현이 뜻하는 심리학적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 산스크리트어로 불은 아그니스(agnis : 라틴어의 이그니스 ignis)이며, 인격화된 불은 신적 중재자인 아그니 Agni 신으로서, 그의 상징은 기독교적 관념과 얼마간 맞닿아 있다.   <상징과 리비도>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의 불은 작열⦁열기⦁힘⦁에너지로서 정신의 마술적인 힘이라고도 표현된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작은 불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내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타오르는 불은 동토에서 얼어붙었던 생명들을 살아나게 한다. 무의식의 생명력을 억압하는 파괴적 삶에서 생명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피워 올리는 창조적 삶으로의 변환이다. 

 생명 그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은 격정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 삶의 순간들에 온전하게 깨어 있어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아갈 수 있다. 그것은 자기만의 독창적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채워 넣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다라는 개성화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득지는 고유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왜 무아의식을 참된 의식이라고 하고, 참된 의식은 왜 기능해야만 하는 것일까? 무아의식은 원형의 에너지로서 정신의 절대의식이자 절대적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소를 찾고자 하는 의식은 '의식의 의지'다. 그것이 비록 소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소를 찾아내고 길들이기는 했지만 결국은 자아의식이 만들어낸 주관적 힘이다. 그런데 주관적 의식으로는 의식과 무의식을 한마음으로 통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격의 통합은 반드시 정신의 절대적 객관성이 개입해야만 한다. 

 

 객관성이란 '합목적적인 숙고이자, 도덕적이고 신체적인 힘에 대한 집중'이라고 융은 풀이한다. 그것은 자아의식을 초월하여 있는 정신영역의 기능으로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수한 객관성에 의해서만이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무엇 때문에'라는 것에 대하여 주관적 개입이 전혀 없는 '사실 그대로'의 명백한 인식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인식에 의해서 개인의 인격은 '비상한 성취에 도달할' 정도로 통합될 수 있다.

 

 무아의식은 '지금, 여기'에 단순히 깨어 있음이 아니다. 원형의 객관성은 사실의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이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숙고熟考다. 이러한 무아의식의 객관적 숙고가 일어나야만 마음이 모든 갈등은 스스로 멈추게 된다. 무아의식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무의식적인 반응이란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무의식에 대한 분명한 의식성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감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정감적 반응은 대결상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난다. 갈등이 멈춰야 혼란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과정들은 정신통합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들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할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다.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이 현재의 처지와 근본적 목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지혜이자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는 일은 외부적 존재가 도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의지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