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체적 인격으로의 완전한 전환이 일어나다
융은 '종교는 전체성과 일치한다. 정말로 그것은 '삶의 충만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의 통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여기서 전체성이란 의식과 무의식을 온전하게 포괄하는 정신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어느 한 부분으로만 산다는 것은 결국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본성의 어떤 부분을 없애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종교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諸法實相)을 경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본성인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이 드러난다. 천연 그대로의 심성은 밝은 측면만이 아니라 어둠으로 남아 있는 측면까지를 포함한다. 정신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인식 없이는 전체성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전체적 인격은 무아가 정신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아의식으로는 무의식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다. 자아가 끊임없이 판타지 속으로 달아나는 것도 무의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의식이 중심이 된 정신에서 자아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자아는 자신의 본래적 기능으로 돌아가 충실하게 본분을 다할 수밖에 없다.
자아의 움직임에 의해서 정신적 실상은 밝혀진다. 자아를 매개로 하여 본성은 맨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 본성은 새롭게 채워 넣어야 할 그 어떤 부족함도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자기 본성 그대로의 부처님이다" <육조단경>
라고 말하고, 융이 삶의 충만함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없는 것을 만들어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정신을 통합하는 것이다. 분리된 정신은 통합에 의해서 비로소 한마음(一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우도의 아홉 번째 단계는 깨달음의 과정에서 정수精髓에 해당한다.
단일체는 원을 통해, 네 요소는 정사각형을 통해 표현된다. 넷으로 하나를 만드는 일은 '순환' 형태로 진행된 증류 내지는 승화 과정의 결과다. 다시 말해 '심혼' 혹은 '정신'이 순수한 모습으로 걸러질 수 있도록 증류수는 여러 가지 증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결과물은 일반적으로 정수精髓라고 지칭된다. ⦁⦁⦁⦁⦁⦁ 가장 순수한 최고의 단순성 ⦁⦁⦁⦁⦁⦁ 최고로 순수하고 섬세한 하나, ⦁⦁⦁⦁⦁⦁ 정신(혹은 정신과 심혼)은 처음으로 그 육체와 분리되어 정화된 후 다시금 육체 속에 주입되는 셋의 수(Ternarius)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정신의 네 요소는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성이다. 융이 말하는 네 요소는 전체성을 담고 있는 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전체성을 하나로 만드는 일, 즉 본래의 한마음(一心)으로 회귀시키는 일은 순환형태로 진행된 승화과정의 결과다. 다시 말하면 나를 찾아 나를 떠났지만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이 순환을 통하여 불순문을 걸러내듯이 나를 찾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과정은 정화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정화는 완전한 변환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아가 의식을 주도하지 않는다. 인식의 중심은 무아다. 무아는 늘 자기중심으로 알음알이를 내는 복잡성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최고의 단순성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조하기 때문에 가장 섬세하다. 정신적 추구는 육체를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논문 『결합의 권고(Consilium coniugii)』에는 '철학적 인간'은 '돌의 네 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중 셋은 지상적 성질을 지니거나 지상에 존재하며
"네 번째 성질은 돌의 물, 즉 붉은 고무로 지칭되는 접착성 금으로서 세 가지 지상적 성질이 그것으로써 물들여진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본 바대로 고무는 비판적인 네 번째 성질이다. 즉 그것은 이중적, 즉 남성적이고 동시에 여성적이다. 그리고 또한 오로지 '메르쿠리우스의 물'일뿐이다.
둘의 융합은 따라서 일종의 자기 수정授精인데 그것은 바로 메르쿠리우스 용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암시에서 철학적 인간이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양성 인간, 혹은 그노시스 설에서의 안트로포스Anthropos로서, 인도의 경우에 그와 유사한 것은 아트만이다.
『브라다라니아가 우파니샤드』는 이에 대해
"그것은 말하자면 서로 껴안고 있는 한 여자와 한 남자만큼이나 컸다. 그는 이러한 자기(Selbst, 아트만)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거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생겨난 것이다. 그는 그녀와 결합하였다"
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공통된 근원은 양성兩性을 지닌 근원적 존재에 대한 원시적 관념에 있다.
네 번째 성질은 - 『결합의 권고』의 원전으로 돌아가자면 - 인간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목표를 표현하는 인간의 전체성의 표상인, 안트로포스 이념과 직접 연계된다. 그는 네 번째로서 셋에 합류하며 그로써 통합을 향한 넷의 합성을 만들어낸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즉 네 번째 성질은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인간이 있기 전부터 존재한다.' 인간이란 자아의식의 발달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은 의식이다. 의식은 아트만에 의해서 태어났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성장한다. 아트만은 의식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이 성장하도록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첫 번째 희생을 했다.
의식은 성장과정에서 아트만의 존재를 잊어버리지만 그 존재를 다시 깨우쳐 주는 일도 역시 아트만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아트만은 전체성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이란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전체적 인격이다. 십우도의 아홉 번째에서 부분적 인간은 '철학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철학적 인간'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것은 개성화 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서의 고유성을 발견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철학적 인간'이 요구되는 것일까? 깨달음은 중도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중도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아는 허구적 상상을 연기하는 배우다. 그러므로 자아는 실재를 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상을 향해 꿈꾼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허구는 실재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허구 안에서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이것이 자아로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이유다.
자기 자신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은 오직 무아의식이다. 무아의 절대의식은 자기 발전의 내적 원리이며 영성의 완성작용(엔텔레키 Entelechie)이다. 즉 의식의 발전과 전체성의 완성을 위한 목적성이 정신에 이미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작용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엔텔레키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엔텔레키가 관철되면 의식은 전혀 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원형과 무의식>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자신을 고취시키는 것만 보고 싶어 하는 자아를 무아의식은 관조하게 된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인식과는 차원이 다른 인식능력이다. 그것에 의해서 정신의 전체성은 드러난다.
"생명 샘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좋은 반려자이지만 위험을 갖고 있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만이 생명이다. 고정된 것은 생명이 없다. 자아는 영원히 변치 않고 고정되어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새로워지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온 세포가 죽음으로써 새로운 세포가 생겨난다. 의식이 완전히 다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것을 덮고 있는 껍질인 자아가 희생되어야만 한다.
죽지 않는 한 새로움이 없다. 그것은 자아에게 엄청난 위험이다.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나'라고 주장할 테두리를 만들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식이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