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 반본환원 : 근원으로 돌아가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8. 11:15

9. 반본환원 : 근원으로 돌아가다

2) 완전한 인격은 절대적 객관성에 의해서 완성된다

 "일정한 장소에 일정한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빠른 속도로 현실성을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석이란 선물이 있다. 또 한편 결정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 그에게서 결단력을 빼앗아간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무아는 외부의 대상을 보는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명상하는 기능이다. 부처의 명상에 의해서 중생의 어리석음은 반야의 지혜로 거듭나게 된다. 혜능 역시 자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곧 부처라고 말한다. 

 

⦁⦁⦁⦁⦁⦁ 사람들이 만약 중생의 본질을 파악한다면, 그것은 불성을 알았다는 것이 된다. 만약 중생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부처님을 찾아도 만나기는 어렵다. ⦁⦁⦁⦁⦁⦁ 부처님을 만나고 싶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중생을 파악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부처님이 중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본성이 깨어 있으면 그 중생은 바로 부처님이다. 자기 본성이 잠자고 있으면 부처님도 중생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본성이 평등⦁솔직하다는 점에서 중생은 부처님이며, 자기 마음이 비틀려 있으면 부처님도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 마음이 비틀려 있으면 부처님은 중생 속에 파묻혀 버린다. 일념一念의 마음이 평등⦁솔직하게만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중생이 부처님으로 되는 것이다.  <육조단경>

 

 즉 자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중생이고 무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부처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지만 무아는 자기 자신을 절대적 객관성으로 본다. 절대적 객관성은 혜능의 말처럼 '마음이 평등⦁솔직하게만 있는 것'이다. 혜능은 만물의 도리를 양변으로 설명한다. 모든 진리란 양변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중생이 부처를 알기 위해 열망해 왔다면, 이제 부처가 중생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고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다. 견성 이후에야 비로소 자아와 무의식은 무아의 절대의식에 의해서 명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그대들의 의견을 물어올 경우, 유有를 질문받으면 무無로 대답하고, 무를 질문받으면 유로 대답해야 한다. 범凡을 질문받으면 성聖으로 대답하고, 성을 질문받으면 범으로 대답해야 한다. 대립된 한 쌍의 개념이 서로 조건이 되어 증도中道의 의미가 우러난다. 그대들은 하나를 질문받으면 그 하나를 대답해야 한다. 다른 질문도 모두 그렇게 처리하면 도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가 '무엇을 어둠이라 부르느냐'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밝음이 원인이며 어둠은 연분이다. 밝음이 침몰하며 어둠이 된다'라고. 이와 같이 밝음으로써 어둠을 나타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낸다. 그러면 드러내는 것(來)과 제거해 버리는 것(去)이 서로 조건이 되어 중도란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밖의 질문에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육조단경>

 

 자아의식의 특성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선과 밝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악과 어둠에 대해서는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중도가 왜 중요할까? 일방성은 전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은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양변으로 형성되어 있다. 

육조단경

 

 밝음은 어두움이 있기 때문이고, 그 밝음에 의해서 어둠이 분별된다. 어둠에 대한 밝음의 분별은 어둠의 내용들을 인식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성이 필요한 이유다. 어둠을 분별하는 의식성에 의해서 무의식은 의식화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는 정신의 중심이다. 중심이란 밝음의 측면인 의식과 어둠의 측면인 무의식을 포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무의식을 배척한다면 정신의 균형은 무너지고 만다. 자아의 상대의식으로는 결코 무의식을 내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관⦁객관의 대립이 없는 상태인' 무아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무아에 의해서 무명인 자아와 그 뿌리인 무의식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 

 "무란 것은 주관⦁객관의 대립이 없다는 것이며, 사람을 현혹시키는 번뇌의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염念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眞如)의 본성을 생각함(꿰뚫어 봄)을 말한다"    <육조단경> 

 는 혜능의 말에서 무無는 인식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구분하는 자아의식이 아니라 무아의식임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자아의 상대의식이 무의식과 대립되어 있는 이상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무아가 드러나야 자기 자신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관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아는 자아에 의해서 막혀 있던 근원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 모습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무아의 절대적 객관성은 자기 자신에게 작용된다. 그것에 의해서 자아가 전체성에 대한 관조를 어떻게 방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모두 알게 된다. 

 

 자아의 상대의식에게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실재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모든 것을 자아를 중심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적 사고에 의해서 실재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아의식이 드러나면 자아는 그 어떤 트릭도 쓸 수 없다. 자아의 모든 움직임은 태양의 빛과도 같은 무아의식에 의해서 그대로 관조되기 때문이다. 

 

 융은 무아의식을 새로운 인격의 중심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새 인격의 중심은 부처 혹은 자기(Self)의 탄생이다. 자아가 다만 의식의 중심이었다면, 부처 혹은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성의 중심이다. 이것을 십우도에서 '근원으로 돌아가다(返本還源)'로 표현하고 있다.

 

 수행자들로 하여금 당장에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각자가 자기 마음을 관찰하여, 자기 본성에 눈뜨도록 하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눈뜨지 못하면, 반드시 덕망 있는 지도자로서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아는 이를 찾아서, 바른 길에 대한 직설적인 가르침을 받도록 해야 한다.   <육조단경>

 

 혜능은 우리가 본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관찰뿐이라고 한다. 본성을 관찰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눈이고 부처님의 지혜다. 혹시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본성을 관조하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혜능은 본성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은 가장 뛰어난 스승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성을 아는 것만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타인에게 묻고 다닌다. 자기를 보여주는 거울은 자기 안에 있다. 역사적 인물인 고타마 붓다가 나타나도 '나'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거울은 유일무이한 자기 내면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내 안에서 나의 거울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마음을 관찰하는 일이 중요할까? 혜능은 그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관심觀心이라면 자기 본성을 관찰하는 것. 마음은 만물의 주체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것은 한 가지도 없으므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만물을 관찰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구명究明하고 도리를 관찰하는 것."
  <육조단경> 

 

 자기 본성은 만물 주체이다. 그러므로 밖에 있는 것은 모두 자기 본성 안에 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곧 만물을 관찰하는 것이 되다. 즉 '나'를 아는 것이 곧 만물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혜능이 마음을 관찰하여 본심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능히 스스로 본심을 알고 염념念念으로 연마하는 자는, 염념念念 속에서 항상 시방의 항사제불의 12 부경을 공양하고, 염념으로 항상 법륜을 굴린다", 
 "바라건대 모두들 본심을 알고 당장에 성불되기를."    <육조단경>

 

 위와 같은 문장들에서 볼 수 있는 염념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들' 혹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라는 말이라면, 무수한 생각을 관조하여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바로 분리된 정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한마음이다. 

 

 왜냐하면 본심은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들을 알지 않고서는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아는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생각에 얽매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게 생각은 번뇌가 된다. 그러나 무아는 생각들과 동일시하는 주체가 없는 절대의식이다. 그러므로 생각에 구애를 받지 않고 생각을 관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혜능은 그것을 '법륜을 굴린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무기無記다. 

" 마음이 미처 청정하지 못할 때, 행주좌와行住座臥에서 항상 뜻을 가다듬어 보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미처 청정하게 마음의 근원을 비춰보지 못하는 것, 이를 무기無記라 일컫는다. 또 이는 누심漏心으로서 생사의 큰 질병을 면하지 못한다."   <수심요론>

 

 본성은 마음의 근원이다. 무기는 마음의 근원인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즉 무기는 의식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의식하지 않는 삶이란 죽음이다. 삶에 집착하는 자아로 사는 한 자신의 본성을 의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본성은 알지 못하는 한 죽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불도를 배우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눈뜨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돈오頓悟다. 그러므로 혜능은 

 "본성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참된 지혜이다. 바른 지혜가 드러나야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참회 또한 본성을 인식했을 때 가능해진다"
 <육조단경>

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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