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 반본환원 : 근원으로 돌아가다 - 백두산 암반수(巖盤水)
카테고리 없음 / / 2025. 3. 18. 12:45

9. 반본환원 : 근원으로 돌아가다

3) 자기 본성과 자기 마음을 바로 꿰뚫어 보다

 

 제 9 송 : 반본환원返本還源


返本還源已費功  (반본환원이 비공)
爭如直下若盲聾  (쟁여직하약맹롱)
庵中不見庵前物  (암중불견암전물)
水自茫茫花自紅  (수자망망화자홍)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십우도>

 

 인용한 해석에서는 십우도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자.

 

返本還源已費功 爭如直下若盲聾

                                                                    庵中不見庵前物    水自茫茫花自紅

                                                     본성에 돌아와 거듭 돌아보니 너무 경전에 매달렸구나.

                                             귀먹고 눈멀어서 곧바로 반야를 따르지 아니하고 논쟁만 하다 보니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을 보지 못했구나.

                                                            물은 스스로 아득하고 꽃은 스스로 붉건만.

 

   외부를 지향하는 성질을 가진 자아의식으로는 내부를 보지 못한다. 자아의식은 대극으로 인식되는 무의식이 두려워 적대시했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의 모순적 성질을 떠나 완전한 존재인 부처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염심念心을 버리려고 평생을 노력하고 살게 만들었다. 그러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것들은 자아의 허상이었다. 이제 그 모든 자아의 인위적인 노력들은 그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爭如直下若盲聾 귀먹고 눈멀어서 곧바로 반야를 따르지 못하고 논쟁만을 따르다 보니

 부처에 대해서 허상을 가지고 있는 자아가 경전이 말하는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아는 반야를 읽고 반야에 대해서 수없이 들었지만 반야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했다. 논쟁을 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반야의 진정한 뜻은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다. 

 

 "언제나 자기 본성과 자기 마음을 바로 꿰뚫어 보는 것, 이것이 자기 본성 그대로의 부처님이다." 
 <육조단경>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은 무아진 자성밖에 없다. 부처님은 자기 본성 그 자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아로서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다. 

 

 자아는 자기의 본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인 거룩한 부처님을 찾아 밖으로 도를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이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보니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아의 부질없는 행동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반야다. 

 

 일념 일념으로 반야의 지혜가 사물의 진실을 비추어 내고, 항상 사물(法相)을 떠나서 자유자재다. 모든 사물에 대하여 마음대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내세워야 할 아무것도 없다. 자성 그대로가 스스로 깨닫는 것이며, 일거에 깨닫고 일거에 행하는 것일 뿐, 단계란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정립시킬 것이 없다. 부처님은 적정寂靜이라고 말했으니 거기에 무슨 까닭이고 연유가 있겠는가?  <육조단경>

 

 무아의식이 드러나면 반야의 지혜가 사물의 진실을 그대로 비추어 낸다. 이제 어떤 관념도 무아의식을 묶을 수 없다. 스스로 틀을 만드는 자아의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만법이 드러나게 하는 무아의식은 무제한적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 없다. 전체를 인식하는 무아의식이 최고의 지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혜능이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을 자기 본성을 깨우쳐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릇 지도자라면 위대한 조건(인연)을 갖추고 있는 법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을 교화하여 자기 본성을 깨우쳐주는 사람이다. 일체의 훌륭한 가르침은 지도자에 의하여 그 힘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 자기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면 반드시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깨어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깨어난 사람이라면 바깥에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육조단경> 

 

 자기 마음이 왜 부처일 수밖에 없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스승일 것이다. 그것은 부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무아의식이다. 무아의식은 본래 정적도 혼란도 없다. 그러므로 자아가 인위적으로 고요함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아는 스스로 고요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자아의 그런 노력은 모두 깨달음을 거스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끊임없이 외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외면하고 어디 가서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억겁을 닦아도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혜능은 말하는 것이다. 

 

 법박法縛 : <달마어록> "묻건대, ⦁⦁⦁⦁⦁⦁ 마음을 모아 잡고 선정을 하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박정薄情이란 것이다. 소용없는 짓이다. 또 4 선정에서도 모두 일단은 진정되지마는 다시 혼란해지므로 좋지 못하다. 이는 작법作法이다. 도리어 이어 파괴법이며 구경법究竟法이 아니다. 능히 자성의 정적과 혼란이 없음을 터득한다면 곧 자유자재를 얻게 된다. 정적과 혼란에 묶여들지 않는 것, 이는 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육조단경>

 

 인위적인 고요함은 언제든 다시 혼란으로 돌아간다. 대승과 최상승선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대승이라면 보살이 단壇 바라밀을 수행하는 데서 탐진치 3사(事 : 毒)의 체공體空을 관찰함과 같은 것이다. ⦁⦁⦁⦁⦁⦁ 최상승이란, 만약 본래부터 자성을 공적空寂으로 본다면 ⦁⦁⦁⦁⦁⦁ 관찰을 일으키지 않고 ⦁⦁⦁⦁⦁⦁ 최상승선이라 일컫는다.  <신회어록>

 

 대승에는 자아의식이 관찰한다. 왜냐하면 수행이라는 인위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상승선에서는 이미 무아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무아에는 수행이라든가 관찰이라는 인위적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인식주체가 없는 무아의식은 오직 스스로 작용할 뿐이다. 대승에는 자아가 인식주체이고 최상승선에는 무아가 인식주체이다. 

 

전남 순천 송광사 십우도

 ⦁⦁⦁⦁⦁⦁ 일체의 가르침에 모두 정통하고, 일체의 수행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일체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가르침의 틀을 벗어나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게 된 것을, 최상승이라 일컫는다. ⦁⦁⦁⦁⦁⦁ 자네는 자네 스스로가 수행해야 한다. ⦁⦁⦁⦁⦁⦁ 언제 어떠할 때라도 자기 본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인 것, 이것이 4승의 뜻이다.  <신회어록>

 

 "언제 어떠할 때라도 자기 본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인 것"

이라는 말은 자기 본성을 있는 그대로 진실로 보지 못하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최상승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3승과 최상승선을 가르쳤다. 

 

 庵中不見庵前物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을 보지 못했구나.

 

 암자란 집이다. 집은 자기 자신을 상징한다. 암자 속에 앉아 있다는 것은 주관성이다. 주관성은 눈이 멀고 귀가 멀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그 집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집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자 한다면 자신의 집을 나와서 그 집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집의 전체적 모습이 보인다. 무아의식의 절대적 객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水自茫茫花自紅  물은 스스로 아득하고 꽃은 스스로 붉건만.

 물은 무의식이다. 무아의 절대인식으로 보면 무의식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아의식은 의식적 관점으로 무의식을 보아서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염심染心이라 생각하여 없애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 염심은 무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을 염심이라고 규정하여 통합을 방해했던 자아의 상대의식이었던 것이다. 

 

 이제 본성에 대한 인식을 막았던 자아의식의 분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는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상상한 것들만 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실재가 아니라 정신의 허상이다. 정신을 수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수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객체적 정신은 고도로 독립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유한 기능인 의식에 대한 보상 작용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앵무새처럼 길들여질 수 있지만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 무의식의 일종은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훈련시키는 어떠한 시도도 겉보기에는 성공한 듯 하지만 결국은 의식에 상당한 해를 입히게 된다. 그것은 어떠한 주관적 자의성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가 엿들을 수 있을 뿐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이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이것이 바로 무아의식의 출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도로 독립적인 정신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의식의 방식으로 길들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의식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에게 영향을 공급하는 모체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길들인다는 것은 무의식의 생명력을 없애는 것과 같다. 

 

 융은 무의식을 심하게 억압하는 사람일수록 매우 무미건조한 삶을 산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모든 생동감은 무의식에서 나온다.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인식함으로써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산다. 

 

 수행을 통해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격적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훌륭한 인격을 연마하여 마치 무의식을 정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인 현상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융의 이론으로 강조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의식에 해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진정한 의식화는 무아의식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후득지가 필요하고 다시 장터(세상)로 나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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